1.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은 1918~20년의 스페인독감이었다. <위키피디아> “Spanish flu" 기사에 따르면 2년 동안 5억 명이 감염되었고, 사망자 수는 17백만 명에서 5천만 명 사이에 여러 견해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스페인독감이란 이름이 스페인사람들에게는 억울하다. 감염이 폭발할 때는 제1차 대전이 아직 계속되고 있어서 취재와 보도에 제약이 많았는데, 중립국인 스페인에는 그런 제약이 없어서 그곳 사정이 집중적으로 보도되는 바람에 널리 각인된 것이라 한다. 국왕 알폰소 8세가 그 병에 걸린 것도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그 진짜 발원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정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연구가 계속됨에 따라 19184월의 폭발보다 꽤 앞선 시점(길게는 3년까지)에 발생한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니 확실한 결론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 같다.

 

1918년 독감이 20세기 최악의 유행병이라면 인류의 전 역사를 통해 최악의 유행병으로는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이 꼽힐 것이다. 흑사병 사태의 실상에 관해서는 지금도 엇갈리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어서 명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위키피디아> “Consequences of the Black Death" 기사에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세계 인구가 475백만 명에서 35천만 내지 375백만 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인명 피해를 전 인구의 20~25% 수준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보는 것이다.

 

유럽 지역의 흑사병 피해 연구가 다른 지역보다 많이 나와 있는 데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1) 유럽의 피해가 가장 혹심해서. (2) 피해 기록이 제일 잘 남아있어서. (3) 근대적 연구가 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됐기 때문에.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Death#/media/File:Nuremberg_chronicles_-_Dance_of_Death_(CCLXIIIIv).jpg (중세 말기 유럽 회화에 죽음의 무도회가 많이 나타난 것은 흑사병 대유행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Black Death - Wikipedia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Jump to navigation Jump to search Mid-14th century pandemic in Eurasia and North Africa Black DeathSpread of the Black Death in Europe and the Near East (1346–1353) DiseaseBubonic plagueLocationEurasia, parts of Afri

en.wikipedia.org

 

(3)은 당연한 사실이다. 근대적 학문의 발전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의 역사가 인류 역사의 주축이라는 유럽중심주의가 상식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 연구의 압도적 비중이 유럽 역사에 있었고 흑사병 사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른 지역의 흑사병 피해에 관한 연구는 20세기 말에 와서야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2)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당시 유럽은 기록문화가 중국이나 이슬람권에 비해 뒤져 있어서 그 시대로부터 전해지는 기록 전체 분량이 아주 적다. 연구가 집중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1)이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다. <위키피디아> 위 기사에 따르면 1347~51년의 5년간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절반이 흑사병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어 중국에 관해서는 13세기의 125백만 명 인구가 14세기 말까지 65백만 명으로 줄어든 사실만을 제시하고, 중동 지역에서는 1348년을 전후해서 인구의 25~38% 희생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연구 결과로는 중국과 이슬람권의 피해가 유럽에 비해 덜했는지 어떤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 같다.

 

 

2.

 

14세기의 흑사병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로 밝혀졌는데, 박테리아 감염병인 페스트 중 림프샘이 심하게 부어오르는 증상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증세가 참혹하고 치사율이 높아서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중국과 한국 기록에 온역(瘟疫)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 (‘온역이 페스트 외의 다른 전염병을 가리킨 경우도 많이 있다. 영어의 ‘plague'도 마찬가지다.)

 

https://en.wikipedia.org/wiki/Bubonic_plague#/media/File:Plague_-buboes.jpg (사타구니와 겨드랑의 림프샘 염증이 선페스트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이다.)

 

모든 감염병은 어느 곳에선가 안정 상태의 풍토병(endemic disease)으로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범위의 숙주에게 심한 증세를 일으키지 않으면서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원래의 숙주 아닌 다른 동물(인간)이 감염될 때 격렬한 증세를 일으킨다. 풍토병 지역 사람들은 면역력을 키우거나 감염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데, 다른 지역 사람이 들어오면 걸리기 쉽고, 환경이나 여건의 큰 변화로 외부로 터져 나오면 무서운 유행병이 될 수 있다.

 

흑사병은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의 들쥐를 숙주로 잠복해 있다가 몽골제국 건설에 따른 환경 변화를 계기로 터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흑사병을 옮긴 것은 쥐와 쥐벼룩이었다. 집쥐는 들쥐와 달리 감염 후 곧 죽기 때문에 감염 기회가 제한되는데, 중앙아시아 지역의 교통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동 속도가 빨라지면서 널리 퍼져나갈 조건이 이뤄진 것이다.

 

환경과 여건의 변화에 따라 유행병의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문명 발생 자체가 유행병의 위험을 본질적으로 내포한 것이다. 경제 발달에 따라 이동이 늘어나고 도시의 인구 밀집지역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이 문명권의 통합으로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를 바라보는 이면에서 질병의 세계화를 위한 계기도 만들어진 것이다.

 

문명과 유행병의 관계를 생각할 때, 14세기 이전의 유럽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적다는 사실이 눈에 띈다. 기원전 430~426년 아테네의 역병 이래 몇 차례 있기는 하지만 같은 시기 중국의 재해 기록에 비하면 아주 드물다. 그나마 유럽의 질병 유행 기록이라는 것이 모두 지중해세계의 것이고, 서유럽과 북유럽에는 흑사병 이전에 질병 대유행의 기록이 전혀 없었다. 교역 규모가 작고 도시가 형성되지 않은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Black_Death#/media/File:1346-1353_spread_of_the_Black_Death_in_Europe_map.svg (1346-53년 유럽의 흑사병 전파 경로. 흑해 연안에서 출발해 지중해 연안으로 퍼져나간 다음 서유럽을 거쳐 북유럽에 이른 경위가 나타나 있다.)

 

여기서 유럽의 역사적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그리스에서 세계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구역으로 나눠 본 데 그 기원이 있다. 그리스인이 자기네를 유럽에 속한다고 생각할 때, 지중해 건너편인 아프리카와의 구분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시아와의 지리적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페르시아제국을 의식하며 문화적 구분을 생각한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Europe#/media/File:Anaximander_world_map-en.svg (기원전 6세기에 아낙시만드로스가 그린 세계지도.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파시스 강은 그루지야에 있는 리오니 강을 가리킨 것이었다. 카프카스 지역이 당시 그리스인이 인식한 세계의 끝이었던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경계는 나일 강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스인에게 유럽은 동쪽의 페르시아 영역, 남쪽의 이집트 영역과 대비되는 자기네 영역이었다. 로마인이 이 인식을 물려받으면서 아시아와의 경계는 돈 강까지 확장되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후 유럽의 정체성이 다시 인식된 것은 9세기 카롤링거 시대였는데, 이때의 유럽은 로마교회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슬람권은 물론 동방정교회 영역과도 대비되는 것이었다. 15세기 후반 모스크바대공국이 금장한국(Golden Horde)의 통제를 벗어나 서유럽과 관계가 늘어나면서 비로소 지금과 비슷한 유럽의 영역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 대항해시대를 거쳐 유럽인의 해외정복이 시작되면서 정복의 주체인 유럽을 정복의 대상인 여타 세계와 구분하는 의식 속에서 유럽의 근대적 정체성이 세워졌다.

 

고대 그리스-로마인이 생각한 유럽과 근대인이 생각하는 유럽은 위치상으로는 꽤 겹쳐진다. 근대의 유럽중심주의는 그 사이의 연속성을 전제로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흑사병이 덮칠 무렵까지 중세인의 유럽인식은 그와 크게 다른 것이었다. 그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 이후 세계사 속에서 유럽의 역할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