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흐마드와 아르군의 쟁패에서 쿠빌라이가 아르군을 지지했을 것으로 올슨은 추측한다. (같은 책 27-28) 1284년 여름 아르군의 승리에서 1286년 초 책봉 사신의 도착까지 걸린 시간이 이례적으로 짧은 것을 볼 때 책봉 준비가 이미 되어 있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볼라드의 도착은 아르군의 승리 후였지만 역시 아르군 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289년 부카(Buqa)의 처형을 보면 새 체제가 쉽게 안정되지 못한 것 같다. 부카는 아르군의 승리에 결정적 공헌을 한 인물인데, 쿠빌라이가 아르군의 책봉 사신을 통해 부카에게 승상 관직을 수여한 데서 은밀한 방식으로 부카의 향배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 아닌가 추측이 가능하다. 쿠빌라이의 뒷받침으로 일-칸에 버금가는 권위를 갖게 된 부카가 배제되는 것을 보면 쿠빌라이가 애초에 권했던 권력구조가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볼라드는 1286년 초 부사(副使) 이사 켈레메치(Isa Kelemech)와 함께 일-칸국을 떠났는데 이사만 원나라로 돌아왔다. 정거부(程鉅夫)는 이사의 전기에 이렇게 적었다.

 

돌아오는 길에 반란을 만나 정사와 부사가 서로 떨어지게 되었다. [부사인] 이사는 시석(矢石)을 뚫고 이 죽음의 땅을 지나 2년 후 대도(大都)에 도착해 아르군 칸이 보낸 소중한 옷과 허리띠를 바치고 사행을 통해 보고 겪은 일을 모두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황제는 [듣고 난 후] 매우 기뻐하고 신하들을 향해 한숨과 함께 말했다. “볼라드는 이 땅에서 태어나 복록을 누린 사람인데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이사는 그곳에서 태어나 [원래의] 집이 거기 있는데도 나에게 충성을 지켰구나. 참으로 다르도다!” (올슨 같은 책 72쪽에서 재인용)

 

볼라드에 대한 서운함을 비치는 듯한 쿠빌라이의 말이 쿠빌라이의 진심이었을까? 인간적인 서운함이라기보다는 볼라드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 사정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말을 정거부가 이사를 돋보이려고 약간 윤색한 것 같다. 오히려 쿠빌라이는 자기 측근 볼라드가 일-칸국에서 역할을 맡고, 시리아 출신 점성술사이며 기독교도(네스토리아파)인 이사가 자기 조정에 돌아오는 데서 세상을 통합하는 대몽골제국의 의미에 만족감을 느꼈을 것 같다. 이사가 원나라로 돌아오기 전에 아르군 칸의 사신으로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사실도 대몽골제국의 통합성을 말해준다. 대칸의 사신이 제국 바깥으로는 일-칸의 사신으로도 나간 것이다.

 

볼라드는 일-칸국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칸 세계도만 봐도 왕조의 안정이 힘들었던 것 같다. 아르군의 뒤를 동생 게이하투(Geikhatu, 1291-95)가 이어받았다가 죽은 다음 아르군의 아들 가잔(Ghazan, 1295-1304)5촌 숙부 바이두(Baidu)와의 내전 끝에 일-칸에 오른 후에야 계승 문제가 잠잠해졌다. 중국을 완전히 점령한 원나라에 비해 이슬람권의 일부만을 차지하고 여러 적대세력에 접하고 있던(북쪽의 두 개 칸국과 서남쪽의 이슬람권, 서쪽의 기독교권) -칸국은 계승 문제만이 아니라 여러 면에서 불안정한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일-칸국에 안정된 왕조가 자리 잡고 대칸을 받드는 조공관계가 이어지기 바라는 쿠빌라이의 뜻에 볼라드의 사명이 있었을 것이다.

 

이 사명을 무력 아닌 지혜로 수행하는 것이 볼라드의 역할이었다. -칸국 쪽 자료에는 그의 이름이 풀라드 칭상(Pulad Chinksank)”으로 나온다. ‘승상의 직함이 이름의 일부처럼 쓰인 것은 그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칸의 권위는 칭기즈칸의 자손, 톨루이의 가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대칸의 승상으로서 볼라드의 권위는 칭기즈칸-톨루이 가문의 내력을 일-칸국의 누구보다 깊이, 그리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이것이 라시드의 <집사>에도 반영된 것으로 올슨은 추정한다. (같은 책 83-94)

 

-칸국은 원나라의 조공국 중 가장 서열이 높은 나라였다. 그 다음가는 서열인 고려의 내정에 원나라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이하 정동행성)을 통해 간섭한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이 볼라드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

 

정동행성은 원나라 관내의 지방행정기관인 행중서성(행정기구인 중서성의 현지사무소라는 뜻으로 지금의 의 기원이다.)과 동격으로 일본 원정을 위해 설치한 임시기관이었다. 1280(충렬왕 6) 처음 설치된 것을 원정 상황에 따라 없애고 도로 만들기를 반복한 끝에 상설로 하되, 수장인 승상을 고려왕이 겸하고 원나라와의 의례적 관계를 맡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던 정동행성이 부각된 것은 1299(충렬왕 25) 한희유(韓希愈) 반란사건을 계기로 고려 지도부 내의 갈등이 불거지면서였다. 비워놓던 고위직 평장정사(平章政事)에 활리길사(濶里吉思)를 보내 정동행성의 역할을 활성화하면서 두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하나는 고위관리의 처벌을 원 조정에 보고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노비제도를 원나라 기준에 맞춤으로써 지나친 확대를 막는 것이었다. 고려 귀족층은 이것이 고려의 습속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격렬히 반대해서 결국 1년여 만에 활리길사가 소환되고 정동행성의 역할은 도로 축소되었다.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2008)에 이런 생각을 적었다. (157-158)

 

이러한 저항을 자주성의 발현이라 하여 칭송할 것인가? 노비제 개혁을 거부한 사람들이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모두 한결같이 자주성을 보였을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이런 자세 때문에 고려의 사회경제구조는 악화일로의 길을 걸었고, 원나라의 통제가 사라지자 구조적 문제로 인해 왕조가 무너지기에 이른다. (...) 원나라가 고려 국가의 소멸을 원하지 않은 것은 고려 내부에서 제기된 입성(立省, 국왕을 없애고 원나라 관내처럼 행중서성을 만들자는 주장) 청원을 기각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원나라가 구축하는 천하체제에 고려를 적응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려의 법률과 제도를 보편적 기준에 맞추도록 계속해서 압력을 가했다. 이 압력에는 고려의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또한 고려의 문명수준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피정복국 고려에 대해서도 보편적 기준을 권하되 강압적 수단을 가급적 피하는 것이 조공국을 대하는 원나라의 원칙이었다면 형제국인 일-칸국에 대해서는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칸국에서 볼라드의 역할은 힘을 통해 원나라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나눠줌으로써 일-칸국이 원나라와 잘 어울리는 방향의 진로를 찾도록 도와주는 데 있었다. 같은 몽골의 뿌리가 서로 다른 문명의 토양 위에서 번성할 길을 찾는 그 노력의 방향이 두 문명의 융화를 향한 방향이기도 했다.

 

 

Posted by 문천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