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1-95년 사이에 몽골제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1254-1324)가 남긴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은 오랫동안 유럽에서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렸지만, 대부분 독자에게 판타지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뿐이다. 그가 그린 몽골제국, 특히 중국의 웅대하고 화려한 모습이 당시 유럽인의 상상을 벗어나는 것이었고, 내용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중국을 가리킨 이름 ‘카테이(Cathay)’가 참으로 중국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조차 그 책이 나온 3백년 후의 일이었다.

 

폴로의 기록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항해 때 그 책을 갖고 다녔다는 콜룸부스도 그중 하나였다.) 황당해 보이는 내용이 많지만, 지어낸 것으로만 볼 수 없는 상당한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16세기말 예수회 선교사들의 중국 진입 이후 중국에 관한 유럽인의 지식이 늘어나면서 폴로의 기록 중 사실로 확인되는 것이 많아짐에 따라 역사-지리 자료로서 <동방견문록>의 가치도 커졌다. (‘카테이’가 중국임을 확인한 것도 예수회 선교사들이었다.)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폴로의 직접 견문에 근거한 것이라는) 믿는 연구자들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여러 가지 기술적 이유들이 제시된다. 제노아의 감옥에서 폴로의 회고를 작가 루스티첼로가 글로 정리하면서 작가다운 기교를 부린 문제, 필사본의 확산과 번역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문제, 폴로가 겪은 내용과 들은 내용이 혼동된 문제 등이 많이 지적된다. 폴로가 중국을 실제로 돌아다녔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고, 오히려 “그 시기에 그만큼 많은 분량의 정확한 정보를 일개 여행자가 모은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커지고 있다.

 

스티븐 호는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재확인하는 책 <Marco Polo's China: A Venetian in the Realm of Khubilai Khan 중국에 간 마르코 폴로>(2006)에서 흥미로운 추측을 내놓는다. 폴로가 쿠빌라이의 친위대(Keshig)에 들어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다. (165-168쪽) 몇 가지 중요한 의혹을 해소할 수 있는 추측이다. 예컨대 폴로가 쿠빌라이를 여러 번 만났다고 하는데,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면 왜 중국 측 자료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의혹이 있다. 친위대 소속이라면 역사기록에 남을 만큼 중요한 위치가 아니라도 황제를 자주 만났을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동방견문록>의 4부 중 쿠빌라이 조정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제1부 내용에 다른 부분보다 온갖 오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도 이 추측으로 해명이 가능하다. 폴로가 친위대에 들어갔다면, 각지의 상황을 조사해서 황제에게 보고하는 임무도 맡았을 수 있다. 서방 출신의 색목인(色目人)을 행정에 많이 활용한 원나라 관습에 비춰볼 때 ‘이방인의 눈’을 상황 파악에 이용한다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다. 그렇다면 어디를 다니더라도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를 위해 면밀하게 관찰하고 메모를 (머릿속에라도) 남기는 습관을 익히게 되었고, 따라서 초기의 기록보다 정확한 기록을 남기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폴로는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상인은 언제 어디서나 상인 입장에서 중요한 일들을 열심히 관찰하고 많이 기억한다. 그런데 <동방견문록> 제2부 이후의 기록 중에는 상인의 관점을 넘어서는 내용이 많다. 황제의 관심 범위가 폴로의 시선에 투영되어 있었기 때문에 폴로의 관찰과 기억이 그런 폭과 깊이를 가지게 된 것 아니었을까? <동방견문록>의 진실성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저만큼 풍부한 내용을 당시 상황 속에서 모을 수 있었을까?” 하는 경이로움이 의문으로 남아있다. “친위대원 마르코 폴로” 설은 이 의문도 풀어줄 수 있는 가설이다.

 

19세기 후반 근대적 ‘동양학’이 유럽에서 일어날 때 마르코 폴로의 실체 확인이 인기 있는 주제의 하나로 떠올랐다. 중국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고 <동방견문록>의 신뢰도가 높아짐에 따라 그의 흔적을 중국에서도 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일어난 것이다.

 

이때 일부 학자들이 <원사(元史)>에서 ‘발라(孛羅)’라는 이름을 찾아내고 흥분했다.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에 따라 ‘po-lo’로 적히는 이 이름이 마르코 폴로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폴로 일행이 일-칸국을 방문한 1290년 무렵에 이 인물도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럴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이 착각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볼라드(Bolad, 孛羅, 1238?-1313)는 원나라 초기 조정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중서성 승상에 오른(1280) 고관이었을 뿐 아니라 쿠빌라이의 심복 가문 출신으로 아리크 보케 심문(1264)과 아흐마드(Ahmad) 사건 조사(1282) 등 민감한 과제를 맡을 만큼 절대적 신임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1285년 아르군(Arghun) 일-칸의 책봉 사신으로 일-칸국에 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서 근 30년 여생을 지냈다. 차가타이 칸국과의 군사적 충돌로 길이 막혀 귀국하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는데, 석연치 않다. 해로도 있었고 육로도 그렇게 오랫동안 완전 두절된 것은 아니었다. 책봉 사신으로 보낼 때 그의 장기 체류 방침이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의 신분과 명예는 원나라에서 부재중에도 그대로 지켜졌다.

 

토머스 올슨은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에서 볼라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원나라와 일-칸국의 관계를 넘어 중국문명과 페르시아문명 사이의 가교 노릇을 맡았다는 것이다. 폴로와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문명 간 교섭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점, 큰 수수께끼를 남긴 인물이라는 점에서도 폴로 못지않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이 인물을 통해 두 정복왕조 사이 ‘문명동맹’의 의미를 꽤 깊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