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에 군사적 열세를 보이던 남송이 1234년 금나라 멸망 후 40여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몽골제국의 분열과 혼란, 서방 정벌에 치중한 사실, 기마전에 적합지 않은 남중국 지형 등을 흔히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런 설명이 미흡하게 느껴진다. 약탈을 목적으로 하는 정복이라면 세계 최대 보물창고인 남송이 어디에도 밀릴 수 없는 최고의 정복 대상이었다. 이 40여 년의 기간은 몽골 정복자들이 ‘정복’의 의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놓은 ‘업그레이드’ 기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250년대 이후 몽골의 남송 정벌은 거위고기를 먹으려고 죽이러 나선 것이 아니라 알을 낳게 하려고 생포하러 나선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1246년 구육의 조정을 방문한 카르피니(Giovanni da Pian del Carpine)나 1253-55년 몽케의 조정을 방문한 뤼브루크(Willem van Rubroeck)의 여행기에 대칸을 비롯한 몽골 지도자들이 유럽에 관심을 보인 기록을 보면 다른 사회들을 알려고 애쓰는 그들의 자세가 뚜렷하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에게 우대를 받은 이유도 이해할 수 있다. 각지 지도층 자제를 모아놓은 친위대(Keshig)에도 여러 지역의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하는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가 친위대 소속이었으리라는 추측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오고타이 시대(1229-41)부터는 몽골제국의 확장이 단순한 초원제국의 확대에 그치지 않고 복합적인 제국의 건설로 나아간 것으로 보인다. 바필드는 “칭기즈칸의 후계자들은 보편적 통치권을 주장했지만 그 자신은 초원의 장악에 중점을 둔 좁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의 손자들 대에 와서야 거대문명권의 정복이 시작된 것도 계획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보인다(<Perilous Frontier> 198쪽). 그러나 오고타이가 야율초재(耶律楚材)를 등용한 것은 농업지역 경영의 뜻을 세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크리스천 역시 몽케 시대(1251-59)에는 몽골 지도자들에게 정복의 의미가 달라져 있었다는 견해다.

 

1250년대까지 몽골 지도부는 초원과 농지 양쪽의 생산성 유지에 자기네 부와 권력이 걸려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몽케는 페르시아와 중국 정벌에 나서기 전에 조세 부담을 고르게 하고 군사 활동에 따르는 생산력의 파괴를 줄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바그다드 약탈 외에는 몽케 시대의 정벌이 칭기즈칸 시대에 비해 훨씬 파괴성이 덜했음을 올슨은 지적한다. 몽케는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파괴된 지역의 생산성 회복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고 상당한 성과도 거둔 것으로 보인다. (<A History of Russia, Central Asia and Mongolia> 416쪽)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의 충돌을 ‘본지파(本地派)’와 ‘한지파(漢地派)’의 경쟁으로 해석한 일본 연구자들도 있다. 초원의 전통을 지키려는 경향과 중국의 고등문명을 접수하려는 경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익숙하지 않은 새 길을 열려는 한지파에게는 익숙한 길에 한계가 있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새 길이 이끌어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제국의 규모 확대에 따라 전통을 그대로 지키기 어려운 문제는 대칸 계승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칭기즈칸이 후계자를 지명하여 쿠릴타이의 확인을 받게 한 것은 그 단계에서 좋은 계승방법이었다. 쿠릴타이 기간 동안 제국의 대다수 구성원들이 만족할 만한 체제 정비가 이뤄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음 세대로 넘어갈 때는 원만한 조정이 어렵게 되었다. 집권(集權)과 분권(分權)의 모순되는 요구가 모두 강해졌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인식되고 대책이 강구되는 과정을 실증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가 실제로 택한 노선에 비쳐볼 수 있다. 몽케는 대칸 자리를 위해 조치 계의 바투(Batu)와 손잡았고 그 대가로 바투 세력의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차가타이-오고타이 계에 대해서도 통제력 완화를 감수했을 것이다. 그 대신 이슬람권과 중국의 정복과 경영에 몽골제국의 진로를 설정하고 3형제가 나서서 전력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몽케가 그린 몽골제국의 미래는 자기 형제들이 장악할 두 문명권의 역량을 발판으로 초원제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너무 일찍 (50세 나이에) 죽는 바람에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를 서두르는 플랜-B로 넘어가게 된 것 아니었을까. 아리크 보케 외에는 몽케의 아들들을 위시한 톨루이 계 거의 모두가 쿠빌라이를 지지한 것을 보면 그의 즉위가 상당 범위의 합의를 기반으로 이뤄진 것 같다.

 

쿠빌라이의 즉위를 계기로 몽골제국이 4칸국으로 분열되었다고 하지만 평면적 분열이 아니었다.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두 칸국(금장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과 달리 일-칸국은 대칸(원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는 입장을 오랫동안 내세웠다. 원나라와 일-칸국은 나란히 농경제국의 성격으로 바꾸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관계는 군사적 동맹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방면의 교류를 통해 두 문명권을 결합하는 방향의 노력이었다. 4칸국의 분열은 실제에 있어서 초원제국과 정복왕조의 분화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