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시절 윌리엄 맥닐의 <The Rise of the West 서양의 흥기>(1963)를 읽으면서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바닥에 깔린 유럽중심주의가 불만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이번 “오랑캐의 역사” 작업에서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할 마음으로 다시 펼쳐보게 되었는데, 전에 못 본 글 한 꼭지가 붙어 있다. 1991년 재판의 서문으로 “25년 후에 되돌아보는 <서양의 흥기>”라는 글을 붙인 것이다.

 

1990년 시점에서 1963년 초판 내용을 반성한 이 글의 초점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반성에 있다. 유럽의 후계자 미국이 온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1950년대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자신의 인식도 자유롭지 못했음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송나라 시대 중국문명의 힘과 중요성을 경시했던 것을 특히 중요한 문제로 지적한다.

 

한 세대 전까지 내가 접하던 역사서술이 중국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 평가방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변명으로 삼는다. 역사적 중국 강역의 한 부분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왕조라면 제대로 덕을 갖춘 황제 아래 강역이 온전하던 시대에 비해 열등한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는 평가다. ... 자크 제르네(의 1972년 <Le Monde chinois>)에 이르러서야 초원지대에서 송나라 군대의 약세의 원인이 중국의 기술이 전통적 국경 밖으로 퍼져나감으로써 중국과 유목민 사이의 종래의 균형이 무너진 데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 이 균형의 붕괴는 칭기즈칸의 활동을 통해 유라시아 전역에 파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xix 쪽)

 

이 고백에 접하며 금석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50년 전 역사 공부를 시작하던 때에 비해 역사학계에서는 유럽중심주의가 많이 극복되어 있다. 그러나 역사학 밖의 다른 학술분야에는 이 변화가 아직 많이 투영되지 못하고 있다.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단적인 예다. 유럽 패권으로 구축된 세계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밝히는 학설인데도 유럽의 전통 안에서만 문제를 고찰하는 경향은 가치관과 연구방법 자체가 유럽 전통에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맥닐이 송나라에 대한 평가를 특히 통절하게 반성하는 이유는 가치관이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류는 최근 수백 년간 ‘국가 간 경쟁’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 시대의 ‘좋은 정치’는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승리하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정치였다. 온 천하에서 폭력을 줄이는 과제 같은 것은 정치적 과제로 부각되지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태어난 정치철학이 국가 이상의 분석 단위를 갖지 못한 사실을 자오팅양은 지적한다. 

 

중국의 정치철학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 즉 내가 말한 ‘천하체계’의 이론을 창조하려고 했다. 이것의 이론의 틀과 방법론은 서양의 정치철학과 매우 다르다. 먼저 이론의 틀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정치철학은 천하를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한 정치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딴 것에 앞서는 분석의 단위로 간주했다. 이것은 국가의 정치 문제를 천하의 정치 문제에 종속시켜 이해하려고 한 것이자 천하의 정치 문제는 국가의 정치 문제가 근거하는 것임을 의미했다. (노승현 옮김 <천하체계> 29-30쪽)

 

송나라 때의 중국에도 국가주의가 있었고 애국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치의 전부가 아니었다. 인종(仁宗, 1022-1063) 때 송나라 조정을 그린 연재사극 <청평악(淸平樂)>이 중화방송에서 방영되고 있는데, 당시의 정치상을 깊이 있게 다룬 일품이다. 인종 때는 서하(西夏)가 칭제(稱帝)하며 송나라가 위축된 시기인데, 그때도 유교 원리가 정치에 잘 반영되고 경제적 번영이 이뤄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어쩌면 금나라에 대한 굴욕적 정책을 주도한 진회(秦檜, 1090-1155)가 최악의 간신으로 남긴 오명도 당시보다 후세의 평가로 이뤄진 것인지 모른다. 그가 죽은 50년 후 남송이 금나라를 공격할 때 관작이 추탈되었으나 2년 후 북벌이 실패한 후 회복되었고, 후세의 평가도 크게 엇갈리는 인물이다. 요나라 황손으로 금나라에 출사하다가 몽골의 조정에서 큰 역할을 맡았던 야율초재(耶律楚材)와 같은 실용주의도 그 시대에 널리 통용되었던 것 아닐지.

 

북송 남송 가릴 것 없이 송나라의 문화와 예술은 전통시대부터 높은 평가를 누려 왔고, 근년에는 그 시대 경제와 과학기술의 뛰어난 수준을 밝히는 연구가 많이 나왔다. 모든 방면에서 중국문명의 장점이 잘 발현된 시대로 이제 널리 인식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의문이 더 깊어진다. 이처럼 뛰어난 문물을 자랑하던 왕조가 군사적으로는 오랑캐에 대한 열세를 내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끝내 정복의 대상이 된 까닭이 무엇일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