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즈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차남 차가타이는 장남 조치를 극력 배척했다. 어머니 보르테가 다른 부족에 납치되었을 때 묻어 온 ‘잡종’이라고 주장했다. 둘 사이의 불화가 심해서 무던한 성품의 3남 오고타이가 낙점을 받았다. 4남 톨루이는 막내가 안방을 물려받는 유목사회의 전통에 따라 제국 중심부의 몇 가지 핵심요소를 물려받았다.

 

1241년 오고타이가 죽은 후 아들 구육이 물려받은 데는 이제부터 부자 상속의 원리를 세우려는 뜻이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오고타이 계가 대칸 자리를 독점할 형세가 아직 되지 못했기 때문에 큰 반발이 일어났다. 서방에서 큰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바투(조치의 아들)는 구육을 선출하는 쿠릴타이에 참석을 거부했다. 1246년에야 대칸에 즉위한 구육은 2년 후 군대를 끌고 서방으로 가던 중에 죽었다. 그가 그때 죽지 않았다면 내전이 일어났을 것으로 바필드는 추정한다. (<위태로운 변경> 215쪽)

 

구육이 죽은 후 바투와 톨루이 계의 연합으로 톨루이의 장남 몽케가 대칸이 되었다. 구육이 죽기 전에 차가타이 계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인기 없는 인물을 억지로 앞세웠기 때문에 차가타이 계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힘을 모을 수 없었다. 바투는 4촌들 사이의 가장 연장자인 데다 병력도 컸지만 ‘킹메이커’ 역할에 만족하고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몽골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기 나라를 지키는 편을 택했다. 몽케의 계승을 도와주는 대가로 실질적 독립성을 보장받았다. 차가타이 계는 자기네 영역의 독립성을 강화하는 데 만족했고 오고타이 계는 끝까지 불복하다가 쇠퇴하고 말았다. 칭기즈칸 시절과 같은 통합성은 제국에서 사라졌다. 4칸국의 분열은 이때 시작된 것이다.

 

1259년 몽케가 죽은 후의 계승 분쟁은 형제간에 일어났다. 몽케는 차제(次弟)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 정벌에 나서면서 3제 훌레구를 페르시아 정벌에 보내고 말제(末弟) 아리크 보케에게 수도 카라코룸을 맡겼다. 몽케가 정벌 중 죽자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가 대칸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쿠빌라이가 승리를 거두고 이듬해 대칸 자리에 올랐다. (몽케에게는 9명의 동생이 있었지만 중요한 역할을 맡은 4형제만을 놓고 형제의 서열을 표시한다.)

 

몽골의 계승 분쟁이 제국의 분열로 이어진 경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우연으로 볼 수 없는 하나의 추세가 있는 것 같다. 당시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했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도, 분열의 방향을 정해주는 어떤 기반조건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분열의 단층선이 ‘문명’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착 농경사회가 문명의 주인이고 유목민은 손님인 것이 문명의 ‘정상 상태’다. 정착사회의 질서가 무너져 손님이던 유목민이 주인 노릇을 맡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은 ‘패러다임 전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목민 중에는 주인 노릇을 흔쾌히 맡으려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새 역할을 거부하고 살던 방식대로만 살려 드는 경향도 있다. 몽골제국의 분열은 이 두 개 노선의 분화에 따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리크 보케는 카라코룸에 머물면서 초원의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 입장에 섰기 때문에 형제들과 대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칸 자리에 오른 몽케가 중국 정벌에 나서면서 동생 훌레구를 페르시아(이란) 방면 정벌에 보낸 뜻이 무엇이었을까. 자기 집안(톨루이 계)의 세력 확대를 바라는 몽케 입장에서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방면들을 자기 형제가 독점하고자 한 뜻으로 이해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장기적으로는 초원이 아니라 문명권의 농경지대에 있음을 간파한 것 아닐까.

 

농경지대의 힘은 쿠빌라이와 아리크 보케 사이의 쟁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쿠빌라이는 정면 대결을 서두르는 대신 카라코룸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아리크 보케는 초원을 지키는 유목민의 순수성을 자기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웠겠지만, “순수한 유목민이란 곧 가난한 유목민”이라던 오언 래티모어의 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그는 굶주림을 피해 서쪽으로 옮겨가 차가타이 계와 오고타이 계 지도자들의 도움을 청했지만 거부당하고 패망했다.

 

쿠빌라이가 아리크 보케를 격퇴한 후 칭기즈칸 이래의 수도인 카라코룸을 버리고 지금의 베이징 자리에 대도(大都, Khanbaliq)를 세운 것은 몽골제국 전체에 대한 대칸의 통치권을 축소하더라도 “똘똘한 한 채”에만 집중하겠다는 뜻이었다. 중앙 초원의 차가타이 칸국, 서방 초원의 금장(金帳, Golden Horde) 칸국, 페르시아 방면의 일-칸국(Il-khanate)과 중국의 원나라, 4개 칸국의 분립은 이렇게 이뤄진 것이다. 원나라 황제가 대몽골국 대칸의 지위를 계속 지켰지만 명목상의 권위에 그치게 되었다.

 

칭기즈칸의 네 아들 중 장남 조치와 차남 차가타이의 후손은 칸국 하나씩을 지키게 된 반면 3남 오고타이의 자손은 몽케-쿠빌라이 형제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세력을 잃었다. 한편 4남 톨루이의 자손은 대칸의 타이틀과 함께 두 개 칸국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일-칸국은 다른 칸국들과 달리 원나라의 대칸과 밀접한 관계를 오랫동안 지켰다. ‘일-칸(Il-khan)’이란 호칭 자체가 대칸에게 위임받은 종속적 통치자라는 뜻을 담은 것이었다.

 

일-칸국과 원나라의 사이가 각별히 가까웠던 이유는 중시조인 훌레구와 쿠빌라이가 형제간이었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Culture and Conquest in Mongol Eurasia 몽골시대 유라시아의 문화와 정복>(2001) 및 <Commodity and exchange in the Mongol empire 몽골제국의 상품과 교역>(1997) 등 토머스 올슨의 연구로 밝혀지는 두 나라 사이의 장기간에 걸친 긴밀한 관계를 보면 이유가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일-칸국과 원나라는 초원제국의 성격을 지킨 다른 두 칸국과 달리 이슬람권과 중국의 문명권에 들어가 주인 노릇을 맡은 왕조들이다. 몽골제국의 팽창 과정에서 마주친 양대 문명권의 경영에 몽케-쿠빌라이-훌레구 3형제의 뜻을 모은 결과가 두 왕조였고, 두 왕조가 지속되는 동안 두 문명권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계속되었다. 김호동이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에서 설명하는 ‘세계사’의 탄생을 비롯해 문명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여러 가지 현상이 이 시기 두 문명권의 교류를 통해 빚어지게 된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 걸친 두 나라 사이의 관계에서 ‘유라시아 문명권’의 통합을 향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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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10.21 15:00

    이번 글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셔서 흥분이 넘치다 못해 폭발했습니다!
    말미에 잠깐 남기신 새로운 주제에 대한 연결도 기대가됩니다.
    그리고 유목민들의 철저한 실용성 (영리함)에 그들을 내심 과소 평가했던 과거를 반성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