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바필드는 칭기즈칸이 제국 건설에 유목사회의 전통적 조직 원리를 따르지 않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기 사람’들을 만들어 활용했다고 본다.

 

칭기즈칸은 초원제국을 일으키는 데 부족에 대한 충성심을 활용하기보다는 그 개인의 추종자들을 만들어 조직했다. 대다수 몽골 부족들은 그를 칸으로 선출해 놓고 이듬해에는 등을 돌리는 등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의 삼촌과 형제 중에도 때에 따라 그의 적들과 손을 잡은 일이 많았다. 그런 경험이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에 그는 자기 친족이나 다른 몽골 지도자들에게 권한을 위임할 때 그들의 독립성에 어떤 식으로든 제한을 두려고 들었다. 과거 흉노인과 돌궐인이 자기네 선우와 카간과의 사이에 가졌던 것과 같은 친밀한 관계가 몽골인들과 칭기즈칸 사이에는 없었다. (<위태로운 변경> 191쪽)

 

바필드는 초원제국의 건설자 대부분이 세 가지 유형에 속한다고 보았다. (1) 초원의 한 지역을 차지한 강성한 부족의 지도자가 세력권을 확장하는 경우. (2) 무너진 지 오래지 않은 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경우. (3) 선출을 통해 추대되는 경우. (같은 책 187-188쪽) 칭기즈칸은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조직을 만들어 거듭된 전투를 통해 세력을 키워낸 특이한 ‘자수성가’의 사례라고 한다.

 

바필드는 칭기즈칸이 부족의 전통을 등진 이유를 아버지가 죽은 후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이 유족에게 등을 돌리는 등 개인의 경험에서 찾는다. 그러나 당시 초원의 유동적 상황이 부족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개방적 노선을 뒷받침해 주었기 때문에 주변적 위치에 있던 칭기즈칸이 ‘적자(適者, the fittest)로서 선택’받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자기 부족의 확고한 지지를 받는 지도자들에 비해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던 칭기즈칸 같은 인물이 어떤 장벽을 돌파하기만 하면 훨씬 더 큰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칭기즈칸은 ‘자기 사람’을 만드는 데 몇 가지 제도를 활용했다. 그중 ‘친위대(keshig)’가 그의 조직 원리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린다 코마로프가 엮은 <Beyond the Legacy of Genghis Khan 칭기즈칸의 유산을 넘어>(2006)에 실린 찰스 멜빌의 “The Keshig in Iran: the Survival of the Royal Mongol Household"(135-164쪽)에 친위대의 성격과 기능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1206년 대몽골국을 선포하면서 칭기즈칸은 그 전에 백여 명으로 운용하던 경호대 대신 1만 명 병력의 친위대를 설치했다. 당시 그 휘하의 병력은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된다. 전 병력의 10분의 1을 차지한 친위대는 최강의 정예부대가 되었다. (1206년에는 1천 명으로 시작했다가 차츰 확대된 것으로 보는 연구자도 있다.)

 

다른 부대 장교들보다 더 우대받던 이 정예부대 병사에게는 개인의 무예(와 용모)도 필수였지만, 또한 대부분 지휘관과 귀족들의 자제였다. 각급 지도자들의 ‘인질’을 모아놓는 제도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인질’의 의미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전국시대 이래 중국의 인질에는 단순한 협박의 장치를 넘어 두 나라의 관계를 다각적으로 증진시키는 상주(常駐) 외교관의 역할이 있었다. 한나라에서 청나라까지 황제의 근위대를 지방 세력의 자제로 많이 채운 것도 그 뜻의 연장이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를 인질로 데려간 데도 그런 뜻이 있었다.)

 

친위대의 기능이 군사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기존 행정기구가 맡지 못하는 업무를 대칸 측근의 인재 집단인 친위대가 맡게 되었고, 제국의 팽창에 따라 새로운 일거리가 끊임없이 나타났기 때문에 친위대는 몽골제국의 핵심 조직이 되었다. 쿠빌라이(1260-94) 즉위 후 친위대의 규모와 기능을 축소한 것은 정규 행정조직의 확장과 안정에 따른 결과로 이해된다.

 

칭기즈칸이 자기 친족과 부족에게 절대적 신뢰를 두지 않는 만큼 새로 거두는 추종자와 귀순세력에게는 더 큰 포용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귀순세력의 지도부를 바꾸지 않고 기득권을 인정하는 대신 그 자제들 중에서 친위대 병사를 뽑아 갔다. 인질을 데려간 셈이지만 그 병사들은 제국 핵심부의 구성원이 되어 출세의 길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향의 부형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초기의 친위대는 몽골족과 거란족, 여진족, 한족, 카자크족으로 주로 구성되었지만, 제국의 확장에 따라 동쪽으로 고려인으로부터 서쪽으로 러시아인까지 제국 내 거의 모든 종족을 망라하게 되었다. 스티븐 호는 이탈리아인까지도 (마르코 폴로) 원나라에서 친위대 소속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Marco Polo’s China: a Venetian in the realm of Khubilai Khan 마르코 폴로의 중국>(2006) 165-168쪽)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