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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학은 국민국가와 함께 발전해 왔다. 전근대사회에서도 역사는 가장 중요한 학문 영역의 하나였지만 그것을 전업으로 삼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다수 지식인이 역사를 교양의 한 부분으로 익혔을 뿐이다. 근대 들어 유럽 여러 나라들이 국민국가로 성장할 때 국가이데올로기의 바탕을 만들기 위해 역사 연구를 장려하는 분위기 속에서 근대역사학이 일어났다. 19세기 중엽 독일에서 근대역사학의 초기 발전이 이뤄진 것은 국민국가 형성의 과제가 그곳에서 특히 절실했기 때문이다.

 

대학마다 역사학과를 설치하면서 직업적 역사학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역사학을 근대산업의 한 부문으로 여기고 직업적 역사학자는 학자 이전에 ‘역사업자’의 정체성을 가졌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역사학자 대다수가 대학에 직장을 가지고, 또 그중 대다수가 한국사에 종사하고 있는 까닭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한 사정이다.

 

고대에서 중세까지 지배계층의 기본교양으로 자리 잡고 있던 ‘역사’가 이 단계에 이르러 국민보편교육의 중요한 내용으로 채택되면서 방대한 교육시장을 낀 ‘역사학’이 등장한다. 과거의 탐구를 통해 국가체제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생산, 전국 교육현장에 공급하는 직업적 역사학자들이 나타남으로써 역사학은 하나의 산업분야로서의 면모까지 띠게 되었다. (“기술조건 변화 앞의 역사학과 역사업” 권학수 외 <역사학과 지식정보사회>(2001) 157-158쪽)

 

다른 나라 역사를 공부하는 역사학자들도 대부분 특정 국가(군)의 역사를 전공하는 것이 보통이다. 각 국가의 역사를 주제로 학계가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계가 구성되어 있지 않은 영역을 전공으로 삼으려면 불편하고 불리한 일이 많다. 의견 나눌 학자들을 찾기도 어렵고 연구비를 확보하기도 어렵다. 직장 얻기도 물론 어렵다. 그래서 역사학 분야에는 국가 단위의 역사를 전공 범위로 삼는 관성이 꾸준히 작용한다.

 

20세기를 지내는 동안 이 관성은 차츰 약화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때는 국제정세의 변화가 십여 개 국민국가의 향배에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국가 간 동맹이나 연합은 임의적인 것이어서 큰 구속력도 지속성도 없었다. 1930년대부터 강고한 진영이 구축되고 국가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개별 국민국가의 향배가 전처럼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한 지역의 여러 국가를 묶어서 고찰하는 ‘지역사’가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지역사는 지역학(regional studies)의 발전에 자극받아 일어났다. 지역학은 미국의 세계경영 필요에 따라 형성된 학제간(inter-disciplinary) 분야로 여러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동원되었는데, 그중 인류학이 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인류학의 발전이 근대 학술사의 중요한 현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과정을 세밀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초기의 인류학에서는 과학성과 법칙성을 중시했는데 20세기 중엽 이후 문화인류학 중심의 발전에서는 그런 경향이 약화되는 추세가 있었다는 정도로 이해한다. 인류학이 “인문학 중 가장 과학적이고 사회과학 중 가장 인문적인 분야”라고 한 에릭 울프(1923-1999)의 말이 이 추세를 보여준다. 그런 추세 속에서 인류학과 역사학이 많은 영향을 주고받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학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인류학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주장까지 있었다. (이제 찾아보니 제임스 레드필드(1937~ )의 말이었다.)

 

제도화된 역사학이 국가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 ‘과거의 탐구’라는 역사학 본연의 임무를 인류학자들이 많이 대신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국가주의의 틀로 포착하기 힘든 주제들이 늘어난 것을 인류학에서 많이 다루게 된 것이다.

 

인류학자들이 ‘과거의 탐구’에서 얼마나 중요한 성취를 이뤄 왔는지, 이번 “오랑캐의 역사” 작업에서 절감하고 있다. 작업을 구상할 때부터 바필드의 <위태로운 변경>(1989), 아부-루고드의 <유럽 패권 이전>(1991) 등 인류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연구가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을 예상하기는 했다. 그런데 막상 작업을 시작하고 보니 역사학보다 인류학 쪽 성과를 더 많이 참고하게 되었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서 얻는 가장 큰 도움은 국가주의의 틀만이 아니라 종래 지역학의 틀까지도 벗어나는 새로운 시각을 얻는 데 있다. 종래의 지역학은 세계경영의 필요에 발판을 둔 것이어서 19-20세기 상황에 따라 지역을 구분하기 때문에 과거의 역사적 상황과 통하지 않는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근래 인류학계에서는 기후, 생태 등 기본적 조건들을 감안해서 지역을 구분하는 새로운 기준들이 제시되어 왔다.

 

데이비드 크리스천이 <러시아-중앙아시아-몽고의 역사 1>(1998)에서 제시한 ‘내부 유라시아(Inner Eurasia)’ 개념도 그런 예의 하나다. (크리스천은 제도적으로 ‘역사학자’이지만 그가 제시하는 ‘빅 히스토리’는 인류학에 속하는 것으로 나는 본다.) 몽골, 카자크, 우즈베크, 키르기즈, 투르크멘 등을 개별 민족과 국가로만 봐서는 역사의 큰 흐름을 시야에 담을 수 없다. 그에 비해 유라시아 북부의 광대한 평원 지대를 하나의 무대로 묶어서 볼 때, 유목민의 세계가 역사의 큰 굴곡에서 맡은 역할을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데일 아이켈먼의 <The Middle East and Central Asia, an Anthropological Approach (중동과 중앙아시아)>(제4판, 2001)이 나온 경위도 흥미롭다. 1981년의 제1판은 중동 지역만을 다룬 책이었다. 그 후 공산권 붕괴에 따라 중앙아시아 등 옛 소련 지역에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대상 지역을 확장한 것인데, 그 결과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건조지역을 하나의 무대로 제시하게 되었다. 이 건조지역도 인류 역사의 전개에 꾸준한 역할을 맡은 하나의 장(場)으로 이해할 수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