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국사에서 3세기에서 10세기까지는 종래의 시대구분에서 대개 중세로 여겨진 기간이다. 발레리 한센은 이 기간을 서쪽을 바라본(Facing West) 시대로 설정해서 그 앞의 중국을 발명한(Inventing China) 시대’, 그 뒤의 북쪽을 바라본(Facing North) 시대와 구분했다.

 

거듭 밝히거니와 나는 이 구분에 수긍하지 않는다. 중국의 서방과 북방은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결된 유목민의 세계였다. 한센이 서쪽을 바라본 시대를 말한 것은 서역 바깥에 있던 인도문명권과 페르시아문명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다른 거대문명권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좋은 관점이다. 그러나 내가 수긍하지 않는 까닭은 그 관계가 10세기 이전에 비해 그 후에 더 줄어들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10세기 이후에 바뀐 것이라면 유목민이 중국의 중원을 요---청의 안정된 왕조로 통치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농경사회와 유목사회 사이에 중국문명권 내에서 일어난 변화다. 다른 거대문명권과의 관계의 구조적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조너선 스카프가 전통시대 중국사 서술의 계층 편향성을 지적한 일을 앞에서 언급했는데, 이 편향성은 바필드나 한센 등 다른 유목사회 연구자들도 모두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통성을 중시하는 중국의 주류 지식인과 역사가들이 중화의 관점에 얽매여 역사의 한 측면만을 부각시키고 다른 측면은 파묻어 버렸다는 것이다.

 

20세기 들어서부터 고고학과 인류학 연구의 발전으로 그 편향성을 보정할 근거가 많이 확충된 것이 반가운 일이다. 그 덕분에 유목사회의 역할에 관한 이해가 크게 늘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도, 페르시아 등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또 다른 차원의 편향성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 중앙아시아를 통한 육상 교류에 비해 동남아시아를 통한 해상 교류의 실상을 밝히기가 어려운 문제다. 유목민과의 관계는 왕조의 명운이 걸린 일이기 때문에 기록이 많은 반면 남방의 해상 교류에 관한 기록은 훨씬 적다는 것이 또 하나의 편향성이다.

 

거대문명권 사이의 교류는 장거리 교역의 필요성에 좌우된다. 중국문명은 농경사회의 높은 생산성을 발판으로 경제력을 크게 키워 장거리 교역의 조건을 갖추었다. 교역의 비용을 감수할 만한 사치품의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경제력의 기반이 농업생산력이기 때문에 해로보다 육로의 개척에 나서기가 더 쉬웠다. 사막과 고산준령을 지나는 육로, 실크로드가 오랫동안 해로보다 큰 역할을 맡았던 이유다.

 

중국의 농경지대가 남중국해 연안의 푸젠(福建)-광둥(廣東)-광시(廣西) 지역까지 확장된 것은 4세기에서 12세기까지 꾸준히 진행된 일이다. 이 지역의 경제력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을 때, 교역에 대한 지역 자체의 수요가 자라나면서 해상교역의 본격적 발달이 가능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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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