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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강의실에서 중국사를 가르칠 때 가장 기본 도구는 개설서(통사)였다. 미국산으로 페어뱅크와 라이샤워의 <동양문화사>, 일본산으로 미야자키의 <중국사>, 그리고 중국(대만)산으로 부낙성의 <중국통사>가 번역본이 나와 있어서 활용할 수 있었다.

 

이번 작업을 위해 보다 근래에 나온 개설서를 보고 싶어서 페어뱅크와 골드먼의 <신중국사 China: A New History>(2006 증보판)를 구해 읽고 있다가 지금까지 본 개설서와 아주 다른, 그리고 내 작업에 적절한 참고가 되는 책을 만났다. 발레리 한센의 <열린 제국 The Open Empire: A History of China to 1800>이다. 2000년에 나온 초판은 1650년까지를 살핀 것인데 2015년의 증보판에 1800년까지를 다루는 한 개 장을 덧붙였다.

 

<열린 제국>의 첫 번째 목적은 왕조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통시대 중국의 역사서술에서 왕조사인 정사(正史)’가 워낙 압도적인 중요성을 누렸기 때문에 현대의 연구자들도 왕조사의 틀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문헌자료 중에 정사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래 고고학과 인류학 등의 연구를 통해 획득한 비()문헌자료와 전통적 형태에서 벗어난 문헌자료가 이제 새로운 시야를 어렴풋이나마 열어줄 만큼 분량이 되었다. 한센이 이 새로운 자료를 활용해서 정치-남성-이념 위주의 왕조사를 넘어 사람들의 실제 생활 모습에 접근하려 애쓴 것은 중국사 연구의 오랜 편향성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로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이 책의 가치를 크게 보면서도 중국사 공부하는 이들에게 입문서로 권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상식을 뛰어넘는 관점을 세우는 데 너무 몰두해서 그런지 상식에 미달하는 오류가 너무 많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직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 시대구분에서부터 한계가 드러난다. 1중국의 발명”(-1250~200), 2서쪽을 바라보며”(200~1000), 3북쪽을 바라보며”(1000~1800)3개 부로 구분해 놓았는데, 1부는 중화제국이 존재하지 않은 시기(제국이 아직 자리가 덜 잡힌 약간의 시기 포함)를 다룬 것이므로 그 이후와 크게 나눠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제2부와 제3부 사이에는 구분의 의미가 별로 납득되지 않는다.

 

중국사의 전개에서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동쪽은 바다에 막혀 있고 남쪽은 농업 확장, 즉 화하(華夏) 확장의 방면이었는데 서쪽과 북쪽은 모두 유목민의 활동 영역이었다. ()나라 때의 흉노 이래 몽골계, 돌궐계 등 여러 계통 유목민들이 중국 서북방의 초원지대에서 활동했고, 형편에 따라 북방에서 서방으로, 또는 서방에서 북방으로 옮겨 다닌 일도 많았다. 중국의 서쪽과 북쪽 변경은 모두 유목민의 세계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한센이 서쪽과 북쪽 사이의 차이를 크게 보는 것은 초원지대의 바깥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북쪽의 초원지대 너머에는 동토지대뿐인 반면 서쪽으로 초원지대를 지나가면 페르시아문명과 인도문명이 있었다. ‘서쪽 시대에는 유목민의 세계 바깥에 있는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가 중요했는데 북쪽 시대에는 유목민과의 관계에 묶이게 되었다는 것이 두 시대를 구분하는 취지일 것이다. 그래서 한센은 불교의 역할을 중시한다. 후한(後漢) 말 받아들인 불교가 송()나라 초까지 성행한 사실을 놓고 중국이 서방으로 열려있던 시기로 규정한 것이다.

 

중국에서 불교의 성행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중국사를 크게 구분하는 근거로 삼는 데는 무리한 감이 있다. 인류 문명은 온대지역에서 발생하고 발전했다. 큰 문명권들은 동서(東西)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이었다.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중국문명권에서 보자면 다른 주요 문명권은 모두 서쪽에 있었다. 다른 문명권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중국사의 시대구분을 시도한다면 불교문명권, 이슬람문명권, 기독교문명권과의 관계가 기준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육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와 해로를 통해 주로 이뤄지는 시기를 구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 사이에는 그런 문명사적 의미의 차이가 없다. 중국이 서쪽을 바라봤다고 한센이 말하던 시기의 끝 무렵에 가서야 해상운송이 활발해지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 서방과의 접촉에서는 육로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육로, 즉 실크로드를 이용하는 조건에 계속해서 큰 작용을 한 것은 중국의 서방에서 북방에 걸쳐 활동하던 유목민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