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스키타이인(Scythians)’은 기원전 8세기경에서 3세기경까지 우크라이나 평원에서 활동하며 상당 규모의 정치조직을 발전시켰던 종족이다. 한편 ‘스키타이문화(Scythian Cultures)’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내부 유라시아의 광범한 지역에 나타난 문화적 특성이었다. ‘스키타이문화’보다 ‘청동기시대 북방문화’라는 이름이 더 적합할 것 같은데, 스키타이인이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등장함으로써 유럽인에게 잘 알려진 덕분에 이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까지 흔적을 남길 만큼 넓은 지역에 나타났다는 점에서 ‘스키타이문명’으로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문화’ 차원의 관점이 보통이다. 지역에 따라 그 문화적 특성이 나타난 시기에 상당한 편차가 있고 하나의 ‘문명권’을 대표할 만한 규모의 정치조직도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란 북부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의 황금제 벽걸이. 영웅의 부활을 그린 것이다.
오르도스 지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4세기의 청동제 벽걸이. 사슴이 늑대에게 공격받는 모습을 담았다.
유럽 동북부에서 출토된 기원후 400년경의 사슴 모양 브로치(왼쪽)에 스키타이 예술의 특성이 남아 있다. 서아시아 지역에서 출토된 기원전 5세기의 벽걸이(오른쪽)와 어울리는 모양이다.

 

 

스키타이문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동물의 형상이 고도로 양식화된 장식품이다. 농경보다 수렵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신석기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인류문명 발전의 주축이 된 상황에서 수렵-목축문화가 이처럼 긴 기간에 넓은 지역에 걸쳐 뚜렷한 흔적을 남긴 것은 특이한 현상이다.

 

이 특이한 현상도 ‘그림자 문명’의 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농경 지역에서 일어난 큰 변화의 파장이 비(非)농경 지역에 밀어닥친 결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해서 여러 지역에서 철기문명이 시작되었다. 철기 사용에 따른 생산성 향상은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농업이 더욱 집약적인 형태로 발전하고 잉여생산의 증대에 따라 도시가 자라나고 정치조직이 확장-강화되었다. 기원전 12세기 전반 많은 기존 문명중심지가 거의 동시에 파괴된 ‘후기 청동기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의 원인으로 철기의 출현을 꼽는 학자들은 국가 성격의 변화를 생각한다. 농업에 기반을 둔 전형적 고대국가가 일반화되는 단계로 보는 것이다.

 

목축은 신석기시대에 농경과 나란히 나타난 생산양식인데, 철기시대에 이르러 농경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단계에 이르자 상대적 열세에 빠지게 되었다. 농경이 가능한 기후-생태 조건을 가진 지역의 주민들은 농경으로 전환하거나 주변의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났다. 종래처럼 농경과 목축을 병행할 수 없는 척박한 지역에서는 목축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고, 넓은 초지를 활용하기 위해 유목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내부 유라시아 일대에 스키타이문화가 나타난 시기가 바로 유목 활동의 확산기였다. 안장과 등자 등 기마술의 발달도 이 시기에 유목 활동을 통해 이뤄졌다. 

 

유목은 넓은 초지를 활용하고 생산 품목을 특화함으로써 종래의 목축보다 생산성을 높이는 길이었다. 이런 생산양식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생산물을 교환할 상대로서 농경사회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유목사회는 식량과 생활용품의 대부분을 자체 내에서 생산한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유목사회 연구의 개척자 오언 래티모어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순수한 유목민이란 곧 가난한 유목민이다.(It is the poor nomad who is the pure nomad.)”(김호동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54쪽에서 재인용) 크리스천은 내부 유라시아의 유목 활동이 농경지역과의 경계지역(borderlands)에서 시작된 사실을 지적한다. (1권 17쪽) 배후지역에 비해 인구가 조밀한 경계지역에서 변화가 먼저 일어나고, 배후지역은 경계지역에 노예와 물자를 공급하는 창고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노예의 공급이라는 현상이 눈길을 끈다. 농경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조직력을 강화한 경계지역의 유목민이 채집경제에 머물러 있던 배후지역 주민을 포획해서 노예로 사역한 것은 유목 활동의 확장을 뜻하는 것 아니겠는가. 농경사회가 유목사회를 공격해서 노예를 획득하는 데도 농경 활동의 확장이라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스키타이문화는 채집경제 단계에 있던 내부 유라시아 전역으로 유목 활동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기술력과 조직력이 뒤진 원주민의 저항이 미약했기 때문에 정복자들의 문화적 특성이 큰 굴절 없이 광대한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길이 지형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문명의 전파 과정에도 지리적 조건에 따라 다양한 현상이 나타난다. 외부 유라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선진문명의 흐름이 내부 유라시아로 흘러들 때 광대한 초원이 하나의 유수지와 같은 역할을 맡는 대목들이 있었다. 문명 선진 지역 사이에서는 서로 접촉이 있더라도 기존 문명체계의 저항 때문에 다른 문명의 수용이 억제되는데, 문명 수준이 낮은 내부 유라시아에서는 그런 저항이 약해서 짧은 시간 내에 넓은 지역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농경문명 발전의 한 고비에서 파생된 유목 활동은 스키타이문화를 타고 내부 유라시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접촉면이 큰 광대한 지역의 활발한 변화는 다양한 피드백 현상을 일으켰다. 후세에 나타날 ‘유목제국’에서도 문명 확산의 특정한 단계에서 내부 유라시아의 지리적-생태적 측면이 특이한 역할을 맡는 측면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3세기에 인구 수십만 명에 불과한 몽골족이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일으키는 상황도 이 측면을 읽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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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