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랫동안 책장 한 구석에 파묻혀 있던 책 하나를 꺼내 읽었다. 린후이샹(林惠祥, 1901-58)이 1936년에 낸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상-하). 중요한 주제라서 구해 놓았지만 방법론이 석연치 않아서 서문만 읽고 덮어뒀던 책이다.

 

이번에 “오랑캐” 작업을 하면서 이 책이 생각났다. ‘중국민족’이란 주제의 최신 관점을 파악하려 애써 왔는데, 이 주제에 관한 1949년 이후의 서술은 ‘신(新)중국’ 민족정책에 묶여 있다. 신중국 건설 전에 나온 이 책에서 근대적 연구방법이 적용된 초기 성과의 비교적 객관적인 서술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 것이다. 

 

저자의 관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표 하나가 있다. (상권 9쪽) 윗줄에는 역사에 나타난 16개 종족계열이 계(系)라는 이름으로 나열되어 있고 아랫줄에는 지금의 8개 민족이 족(族)이란 이름으로 표시되어 있다. 각 계와 각 족의 계승관계가 실선(주된 계승관계)과 점선(부분적 계승관계)으로 그려져 있다. 예컨대 한족은 16개 종족집단 모두를 계승했는데, 그중 화하(華夏)와 동이(東夷)등 4개 계가 주축이다. (린후이샹이 말하는 ‘동이’는 산둥(山東)성 지역에 있던 고대의 동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족은 동호(東胡)와 숙신(肅愼)을 주축으로, 그밖의 3개 계를 부분 계승한 것이다.

 

[도판]

 

이 책은 18개 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서론부 2개 장 이후 16개 장에서 16개 종족계열을 각각 다뤘다. 중국사에 나타난 모든 종족집단을 16개 계열로 분류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호계를 다룬 제7장에는 “만주족의 첫 번째 내원”이란 부제가 붙어 있고, 오환, 선비, 유연, 해, 거란이 각 절에서 다뤄져 있다.

 

주변 민족에 관한 중국의 역사기록은 작성 시기 중국인의 인식에 국한되어 있어서 기록 대상에 대한 체계적 이해에 한계가 있다. 만주 지역의 종족으로 어느 시기에는 ‘숙신’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 시기에는 ‘말갈’ 이야기가 나오고 또 얼마 후에는 ‘여진’ 이야기를 하는데, 그 사이의 계승 관계는 무시되거나 아주 소략하게 언급될 뿐이다. 린후이샹은 그 빈틈을 채워 넣는 작업을 한 것이고, 거기에는 추측에 의지한 것도 많지만 주변 민족들의 시간적 흐름을 개관하는 데 좋은 출발점을 제공한다.

 

위 도판에 보이는 한 가지 추세는 북방과 서방의 종족들이 부분적으로만 한족에 흡수되고 주류가 현대의 각 민족으로 이어진 데 반해 남방의 형오(荊吳)와 백월(百越), 그리고 동방의 동이는 한족에 완전히 흡수되었다는 점이다. 중국 농경문화의 확장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북방과 서방에는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다른 문화가 지속되어 중화와 다른 정체성이 유지된 반면 동방과 남방은 농경문화에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종족 정체성이 퇴화한 것이다.

 

애초에 ‘오랑캐의 역사’를 구상하면서 모든 방면을 균형 있게 다루고 싶었다. 그러나 역사가 균형 있게 전개되어 오지 않은 것을 어쩌나. 산둥(山東)에서 광둥(廣東)까지, 전국시대에 오랑캐 지역이던 중국의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가 당송(唐宋) 시대에는 모두 중화에 편입되어 있었다. 동남 방면의 오랑캐라면 한반도와 일본, 유구(琉球), 그리고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긴 시대에 걸쳐 중국과 얽힌 오랑캐의 역사가 긴박하게 진행된 곳은 역시 서북 방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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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