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지도자의 개인기가 큰 역할을 맡던 ‘창업(創業)’ 단계에서 조직력에 의지하는 ‘수성(守成)’ 단계로 당나라가 넘어가는 한 고비가 643년 태자의 폐립이었다. 그 무렵 돌궐의 위협 해소가 그 배경이었다. ‘천가한’의 역할을 위해 돌궐 풍속을 몸에 익혔던 태자를 대신해서 태종이 마음에 둔 것은 <괄지지>를 편찬한 둘째 아들(정실 소생 중) 태(泰)였으나 태자와의 경쟁 중에 실격되고 말았다. 그래서 힘도 없고 꾀도 없는 셋째 아들이 간택되어 6년 후 고종으로 즉위했고, 제국 경영의 칼자루는 무후의 지도력을 통해 공신집단으로부터 관료집단으로 넘어갔다.


창업에서 수성으로의 전환 과정은 황제와 공신집단, 그리고 황후와 관료집단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점철되었지만, 그 큰 흐름은 “순천자(順天者)는 흥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한다”는 속담대로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라 귀추가 결정된 것으로 볼 측면이 있다. 수나라와 당나라에 의해 통일된 중원, 특히 남중국의 농업생산력은 한나라 때에 비해 엄청나게 자라나 있었다. 많은 농민이 폐쇄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장원에서 풀려나 높은 잉여생산율을 실현하고 있어서 인구 증가에 비해 경제총량의 증가가 훨씬 더 컸다. 공신집단의 봉지(封地)와 채읍(采邑)을 줄이는 것이 국가 재정에도 유리하고 인민의 취향에도 맞는 변화였다.


공신집단의 무력(武力)에 대한 수요가 계속 있었다면 이 변화가 억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630년대에 돌궐제국이 와해된 후 많은 돌궐 병력이 당 제국에 편입되어 변경 방어와 정벌 사업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돌궐 외의 다른 오랑캐들도 당나라의 기미정책에 수용되어 싼 값에 무력을 제공하게 되었다. 용병의 성격이 다분했던 이 군대의 급여 등 비용은 주로 비단으로 지불되었다. 서역 방면의 주둔지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는 민바탕 비단은 당시 남중국의 경제력과 북중국의 군사력 사이의 관계를 증언해 준다.


고종(649-683)에서 현종(玄宗, 712-756)에 이르는 당나라의 성세(盛世)는 값싼 군사력의 활용과 효율적인 생산력 수취를 발판으로 한 것이었다. 755년 안록산의 난은 이 체제를 파탄시켰다. 중앙정부의 군사력으로 이 난을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방의 다른 절도사들에게 각 지역의 실질적 통치권을 넘겨줘야 했고, 위구르와 같은 외부 군사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대도시의 약탈을 용인해야 했다. “이게 나라냐!”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안록산의 난 후에도 당나라가 150년간 명맥을 유지한 것은 남중국의 생산력 덕분이었다. 북중국의 대부분 지역을 절도사들이 점거한 상태에서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남중국의 착취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었고 이를 위해 염세(鹽稅)가 활용되었다.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을 비롯한 민란에서 소금 판매조직이 큰 역할을 맡게 되는 배경이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은 송나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당나라 공신세력이 측천무후에 의해 거세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안록산의 난까지 처음 약 백년간은 오랑캐 중심의 절도사 세력에게 급료를 주며 용병으로 썼다. 안록산의 난 후에는 북중국 여러 지역의 통치권을 절도사들에게 떼어주고 외부의 위구르에게 의지하며 약 백년을 더 버텼다. 이 시기 위구르의 번영은 초원지대 최초의 거대도시 카라발가순(Karabalghasun, Ordu-Baliq 라고도 불린다.) 유적에 남아있는데, 그 번영은 당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이뤄진 것이었다. 1889년에 발굴이 시작된 이 도시는 32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이 10미터 높이의 2중 성벽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장안(長安)의 성곽 내부면적은 78 평방킬로미터) 애초에는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었다고 한다.


840년에 위구르제국이 무너진 후에는 보호자를 잃은 당 왕조가 치안 능력조차 상실하고 말았으니 5대10국의 혼란은 907년 공식적인 왕조의 종말보다 훨씬 더 일찍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중원의 거대제국과 초원의 거대제국 사이의 상관관계를 제기하면서 위구르제국의 붕괴로부터 백여 년간을 중원과 초원이 함께 무정부상태에 빠져 있던 시기로 예시한다.


위구르제국 붕괴 이후 뚜렷한 강자가 나타나지 않던 북방에서 10세기 들어 세력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동북방의 거란(契丹)이었다. 정북 방면의 오랑캐는 흉노에서 유연, 돌궐,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유목 외의 산업을 거의 가지지 않은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 동북방 만주 방면의 오랑캐는 유목 외에도 수렵과 농업 등 다양한 산업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5호16국 시대에도 이 방면에서 나온 선비족(모용부)이 호-한 2중체제 형성에 앞장섰던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