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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태조가 옛 동료들의 병권 반납을 권한 “술 한 잔에 군대 내놓기(杯酒釋兵權)” 술자리가 961년 7월에 있었으니 즉위 후 1년 반 만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후주(後周)의 잔여세력을 평정해서 국내의 안정을 겨우 취해 놓았지만 중원은 아직 여러 할거세력으로 쪼개져 있어서, 재통일까지 아직도 십여 년의 정벌 사업을 앞두고 있었다. 군사력의 필요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병권의 집중을 서두른 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 후기 이래 ‘절도사(節度使)’로 대표되는 지방 병권이 국가체제에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 절도사의 위치에서 실력을 키워 온 태조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사실 태조의 즉위 시점에서 중원 재통일 사업은 후주 왕조에 의해 고비를 넘긴 상황이었었다. 조만간 이뤄질 재통일 자체보다 왕조의 지속성 담보를 태조는 더 중요한 과제로 여겼을 수 있다. 당나라가 문을 닫은 후 불과 50여 년 사이에 다섯 개 왕조가 주마등처럼 명멸한 끝에 자신의 송나라가 문을 열게 된 것 아닌가.


송나라는 이렇게 개국 초부터 무력을 억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중국문명의 가장 찬란한 꽃을 피운 송나라를 자랑스러워하는 중국인들이 오랑캐와의 관계를 놓고는 당혹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정이다. 5대10국(五代十國)의 혼란은 수습했지만 주변 오랑캐와의 관계에서는 근 3백년간 굴욕적인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폐(歲幣)’의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보내줘야 했고, 중원의 일부를 떼어줘야 했고, 결국 몽골의 침공으로 멸망에 이르렀다.


송 태조를 보좌한 승상 조보(趙普)가 역사상 손꼽히는 명 재상이었는데, 그가 “남쪽을 먼저, 북쪽을 나중에, 쉬운 것을 먼저, 어려운 것을 나중에(先南後北、先易後難)”라는 방침을 권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방침이 현실에 얽매이는 소극적 전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전투력보다 경제력을 앞세운 원대한 전략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눈에 보이는 군사적 성공을 서두르지 않고 남방의 경제력을 먼저 확보해서 유리한 조건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농업생산력이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마크 엘빈은 (1973)에서 11세기를 전후한 중국의 ‘농업혁명(green revolution)’을 이야기한다. 선사시대의 농업 발생 이후 가장 큰 농업생산력의 향상이 송나라 때의 중국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농업기술의 획기적 발전은 남방의 벼농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것인데, 이것은 송나라 이전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송나라의 치안 안정 덕분에 발전의 성과가 널리 보급되고 큰 경제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황하 유역 중심의 북중국과 장강 유역 중심의 남중국을 통상 회수(淮水)를 기준으로 구분한다. 남중국은 전체적으로 북중국에 비해 기온이 5도 이상 높고 강우량이 3배가량 많다. 초기 농업 발전에는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기술이 어느 수준에 도달한 후에는 생산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한나라 때는 남중국 인구가 북중국의 절반이 안 되었는데, 송나라 때는 비중이 뒤집어져 있었다. 수나라 통일 후 첫 번째 사업이 남중국의 식량을 북중국으로 옮겨가기 위한 운하 건설이었다는 사실이 이 변화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바둑에 “부자 몸조심”이란 말이 있다. 형세가 유리할 때 방어적 전략을 취하는 것이다. 예리한 도발이 들어오면 조금씩 양보하며 적당히 처리해서 유리한 형세를 지킨다. 문무(文武)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제압해 봤자 이득도 별로 없는 오랑캐를 몽땅 제압하겠다고 군사력을 극대화하려 들면 군사비가 많이 들 뿐 아니라 내부의 강한 군사력이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송나라가 요(遼)나라와 금(金)나라에 매년 세폐로 보낸 수십만 량 은과 수십만 필 비단이 큰 손실 같지만, 평화의 값으로 무리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북중국을 금나라에 내어주고 남송으로 쪼그라든 것도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을 지킨 ‘강소국(强小國)’ 전략이었기에 몽골의 침략을 금나라보다 50년 가까이 더 버텨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