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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에서 13세기에 이르는 당송(唐宋)시대는 중국문명이 가장 크고 화려한 꽃을 피운 시대로 널리 인식된다. 이 시대의 뛰어난 문학작품에 대한 후세사람들의 흠모 때문에 문학사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관점이지만, 다른 방면에서도 이 시대 중국의 찬란한 모습이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당나라 초기의 거대한 제국 건설과 송나라 시대의 화려한 문화와 기술 발전이 찬탄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앞쪽과 뒤쪽 사이에는 중국인의 사는 방식에도 국가의 운영 방식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대다수 인민이 폐쇄적인 부병제(府兵制) 아래 생활한 반면 송나라 후기의 사람들은 고도로 발달한 시장경제 속에서 살았다. 국가의 역할에도 그에 상응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 1901-1995)는 1940년대부터 이 국가 성격의 변화를 무력(武力)국가에서 재정(財政)국가로의 전환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시대의 윤곽을 그려놓은 미야자키의 관점은 후진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재정국가라 함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뜻이 있다. 하나는 국가 내 경제활동이 커져서 그로부터의 조세 수입이 국가체제 운영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국가 경영에서 명쾌한 폭력보다 치밀한 관리가 더 중요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후자의 의미를 먼저 한 번 살펴본다.


사회 운영에는 ‘힘’이 필요한 측면과 ‘꾀’가 필요한 측면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 두 측면을 ‘무(武)’와 ‘문(文)’으로 인식해 왔다. 페어뱅크와 골드먼은 <China, a New History(신중국사)>에서 무를 경시한 송나라의 풍조를 그리면서 유가사상이 원래 무를 천시했기 때문에 사-농-공-상(士農工商)의 4민(四民)에도 넣지 않았다고 한다. (108쪽) 


이것은 심각한 오해다. 제2, 3, 4 계급인 농-공-상은 현대 용어로 하자면 1차, 2차, 3차 산업을 가리킨 것이고, 제1계급인 ‘사’는 사회 운영의 담당자였다. 4민 개념이 출현하던 춘추시대의 ‘사’는 원래 무사(武士)였다. 전국시대에 문사(文士)의 측면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제국시대 들어 문사의 비중이 점점 커져 무사의 위상을 압도하게 된 것이었다.


정치조직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 운영에서 힘보다 꾀의 중요성이 커진다. 조그만 나라들이 각축하던 춘추시대에서 7웅(七雄)으로 세력이 모이던 전국시대를 지나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무사보다 문사의 역할이 커진 것은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한나라 쇠퇴 후의 혼란 속에서 무의 중요성이 다시 살아났지만, 남북조를 거쳐 수-당 제국의 재통일에 이르는 동안 문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나라가 안정을 얻게 되자 바로 문민(文民)화의 길을 걸은 것은 “말등 위에서 천하를 얻을지언정 말등 위에서 다스릴 수는 없다”는 이치대로였다.


문의 수요가 일어나기 시작할 때는 글만 읽는 선비가 이례적 존재였다. 무력이 선비의 기본이었고, 개인의 전투능력보다 무리를 이끄는 힘이 무력의 더 중요한 측면이었다. 위(魏)나라 이후 오랫동안 관리 등용에 쓰인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는 향촌의 동원력을 가진 호족(豪族) 계층을 국가체제에 편입시키는 데 큰 효용이 있었다.


자기 세력기반을 갖지 않은 전문적 문사를 관리로 등용하는 제도가 과거(科擧)였다. 과거제의 기원에 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분분한데, 그 여러 특성이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볼 때 어느 시점으로 확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측천무후(則天武后) 시기에 과거제의 역할이 크게 자라난 사실에 대해서는 이론이 없다. 과거제를 통한 관료 충원 비율은 아직 높지 않았지만 과거 출신자들이 고위직에 진출하는 비율이 크게 높아진 것이다. 그리고 송대(宋代)에 이르면 관료 등용의 주된 통로로서 과거제의 역할이 확립된다.


하나의 왕조가 경쟁세력을 물리치고 자리 잡는 과정에서는 “마상득지(馬上得之)”의 표현대로 무력에 우선 의지한다. 많은 무장 세력을 규합하는 지도자가 창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왕조가 수립되고 나면 방대한 제국의 운영을 위해 조세 수취율을 높여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에만 충성하는 관료집단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무장 출신으로 송 왕조를 연 조광윤(趙匡胤)이 자신을 추대했던 옛 동료 장군들을 모아놓고 조기 퇴직을 권한 것은 그런 필요 때문이었다. “떡 하나씩 드릴 테니 자네들만 드시고, 주변에 떡고물 바라고 꼬여드는 세력은 흩어 버리시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