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리 가한의 몰락에 관해 정재훈은 <돌궐유목제국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릭(힐리) 카간이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한 것은 동돌궐 정권이 그동안 수조의 지배 아래서 지나치게 중국에 의존하다가 수말 당초의 결정적 계기에도 불구하고 북중국에 단순하게 간섭하며 ‘다자적 관계’를 유지하고 통제하는 데만 집착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 일릭 카간은 충분한 능력이 있었음에도 당초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던 북중국 정권을 대체해 과거 북위 또는 이후의 이른바 ‘정복 왕조’처럼 보다 안정적으로 내지를 직접 지배하고 수취하는 체제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 (327쪽)


정재훈은 ‘정복 왕조’ 세우는 것을 유목민의 ‘성공’으로 보는 고정관념을 가진 것 같다. 나는 바필드의 ‘외경(外境) 전략’과 ‘내경(內境) 전략’ 개념을 더 그럴싸하게 본다. 유목민의 이해관계를 유목민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화제국의 외부에 세력을 이루고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것이 외경 전략이고, 중화제국 내부에 들어가 통제를 받으며 역할을 맡는 것이 내경 전략이다. 정복 왕조는 제국이 쇠퇴할 때 외경이 아니라 내경 상태의 오랑캐가 체제를 넘겨받음으로써 세워지는 것이 통상적인 경로였다. 외경, 내경, 정복의 전략은 유목세력이 임의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돌궐 제1제국은 (6세기 중엽의 발흥에서 630년까지를 제1제국, 687년의 부흥에서 745년의 멸망까지를 제2제국으로 통상 부른다.) 수-당 제국에 대해 외경 전략을 구사했다. 한나라에 대해 외경 전략을 구사하다가 한나라의 안정 이후 격파당한 흉노제국처럼 돌궐제국도 당나라 초기까지 유리한 입장에 있다가 당나라의 안정에 따라 격퇴된 것이다. 당나라가 상당 수준 ‘오랑캐화’된 체제였기 때문에 한나라보다 오랑캐 문제에 대한 대응이 더 빠르고 쉬웠으리라고 생각된다.


제1제국의 붕괴 후 돌궐은 당나라의 기미(覊縻)정책에 묶여 당나라의 정복사업에 군사력으로 활용되었다. 680년대에 이르러 그 일부가 이탈해 북방의 초원으로 돌아가서 세력을 키우고 690년대 들어 당나라 변경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외경 전략으로 돌아간 것이다.


돌궐의 이탈과 부흥은 당나라 조정의 문민화(文民化)의 결과로 보인다. 태자 승건의 폐위는 황제의 군사적 역할이 줄어드는 신호였다. 형들의 각축 중에 어부지리로 태자가 되고 황제가 된 고종은 모든 기록에 온순한 성품으로 그려진 인물이다. 그는 황후인 무후(武后)에게도 대단히 온순해서 그의 재위 중반 이후에는 무후의 통치가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측천무후(624-705, 재위 690-705)의 통치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는 업적 하나가 관료제의 발전이다. 귀족 중심의 무력(武力)국가에서 관료 중심의 재정(財政)국가로의 전환을 당나라 때 중화제국의 중요한 변화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다. 제국 내부의 착취체제를 발전시키면서 외부에 대해서는 “돈으로 평화를 사는” 정책을 기조로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후가 659년 황후에 오른 후 오랫동안 조정에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당나라가 과감한 정복보다 치밀한 관리를 필요로 하는 때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630년 제1제국의 붕괴 이후 돌궐은 당나라 군사력의 주축이 되었다. 당 제국의 팽창 과정에 핵심 역할을 맡으면서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660년대 고구려 정벌을 끝으로 당나라의 정복 사업이 마무리되면서 그 군사적 역할이 줄어들었다. 680년대 돌궐제국의 부활은 내경 전략에서 외경 전략으로의 복귀였으며, 당나라에서 내경 전략의 수익성이 떨어진 결과였다.


돌궐 제2제국은 제1제국만큼 큰 세력을 떨치지 못했다. 당나라 안에서 돌궐 외에도 많은 오랑캐 세력이 내경 전략을 펼치고 있어서 돌궐의 외경 전략이 큰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돌궐 제2제국이 745년 내분으로 멸망한 후 유목사회의 패권을 장악한 위구르(回纥)가 외경 전략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에서 평가한다.


“전통적 역사에서는 유목민을 중국 정복의 야욕을 가진 위험한 적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유목민이 중국에 대해 위험한 존재이기는 했지만 간접적 착취를 더 좋아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나라에 대한 위구르의 정책이 이 현상의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위구르는 처음부터 약해지고 있는 당나라를 내란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입장을 취했고, 그 대가로 엄청난 분량의 비단을 받아 초원지역에서 역사상 가장 부유한 유목민이 되었다. (...) 중국 왕조에 대한 위협은 간접적으로 유목국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유목군주는 어떤 변화보다도 수지맞는 현재 상황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중국 왕조가 내란이나 침략으로 무너지면 그만큼 자기네를 우대해 주지 않는 세력이 권력을 쥘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서 위구르는 당 왕조의 보존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840년에 위구르 제국이 무너지자 당나라는 보호자를 잃고 멸망을 기다리는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150-151쪽)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당 조정이 통제력을 잃었을 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신흥세력 위구르였다. 위구르는 작은 군대를 보냈지만 몇 차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가져왔다. 757년과 762년 반란군이 점령했던 수도 낙양을 되찾았을 때 위구르 군대가 며칠 동안 마음껏 약탈하도록 허용한 사실을 보더라도 그 역할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당나라의 전반기에는 돌궐, 후반기에는 위구르가 최강의 초원세력으로 부각되었는데, 그 그늘에서 눈길을 끄는 존재가 있다. 소그드인(Sogdian)이다. 소그드는 한 무제 때 장건(張騫)의 보고에 ‘강거(康居)’로 나타났고 당나라 기록에는 ‘강국(康國)’으로 나오며, 지금의 사마르칸드 지역이 그 본거지였다. 그런데 소그드인은 일찍부터 상업 활동에 매진해서 중국으로부터 동로마제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디아스포라를 형성하고 상품과 문화의 교류에 앞장섰다. 돌궐과 위구르 제국에서 소그드인이 행정을 많이 담당하고 당나라에 보내는 사절단에도 많이 참여했다고 하는데, 그 부족의 상업 활동을 배경으로 한 현상이었을 것이다. 소그드는 별개의 국가로서 국세를 떨친 일이 없기 때문에 기록이 많지 않은데, 실크로드의 ‘소프트웨어’ 역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백 년 후 몽골의 세계정복이라는 특이한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소그드인의 활동방식에서 어떤 열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숙제로 남겨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