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와 천가한을 겸하던 태종의 2중성은 고종(高宗, 재위 649-683) 이후 재현되지 않았다. 바필드는 이 때문에 당 제국의 광영이 감퇴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나는 이것이 태종 자신의 결단에 따른 것으로 본다. 태종이 후계자 문제에 임하는 태도에 이 결단의 과정이 보인다.


태종의 즉위 직후 8세의 장남 승건(承乾)을 태자로 책봉한 것은 자신이 겪었던 황위 계승의 투쟁이 되풀이되지 않기 바라는 뜻이었다. 그 후 10년간 태자 승건에 관한 기록은 찬양 일색으로 남아있다. 그러다가 638년경부터 태자의 ‘기행(奇行)’이 기록되기 시작하다가 643년 모반의 죄로 폐위되고, 태종이 사형만은 면제해 주었으나 1년 후에 죽었다.


638년에 승건의 한 살 아래 동생인 태(泰)가 방대한 지리서 <괄지지(括地誌)>를 완성한 일을 태종이 엄청나게 띄워주었다. 그로부터 태의 정치적 권위가 커지면서 태자 자리에 위협을 느낀 승건이 태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이 그의 모반 내용이었다. 즉위 후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태종이 원하는 후계자의 스타일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 승건과 태 사이의 긴장관계를 불러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발레리 한센은 <열린 제국(The Open Empire)>(2015)에서 태자 승건에 관해 이렇게 썼다.


“(태자의) 빠른 선택이 꼭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 아들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아들의 궁중 악사와의 동성애 관계에 분노한 태종은 그 악사를 처형했다. 태자는 중국어 쓰는 것을 거부하고 돌궐(突厥)어와 돌궐 복장을 고집함으로써 당나라 황실의 중앙아시아 뿌리가 아직도 얼마나 가까이 있었는지 보여주었다.” (181쪽)


순진한 관찰이다. 승건이 폐위된 뒤에는 그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제를 승건의 개인적인 것으로 돌리려는 경향이 있었다. 돌궐 풍속을 좋아한 승건의 ‘기행’은 그 앞 세대에서는 ‘기행’이 아니었다. ‘천가한’으로서 태종의 풍모는 위대한 오랑캐 족장의 모습 그대로였다. 즉위 초년의 태종이 후계자에게도 ‘천가한’의 풍모를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필드가 <위태로운 변경>에서 “돌궐풍 태자인 승건이 황제가 되었다면 유목생활에 대한 그의 친근함과 애정을 바탕으로 중국에 두 번째 천가한이 나타났을 것”(146쪽)이라 한 말이 실상에 더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즉위 10년이 지나 정관률을 완성한 시점에서 태종은 대당제국의 장래가 황제와 천가한을 겸하는 지도자의 개인플레이보다 체계적 제도에 의지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었다. 차남 태의 <괄지지>는 이 방향에 영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태종의 각별한 상찬을 받았던 것이다. 태자가 이것을 보고 이 방향의 노력도 보완함으로써 두 측면을 겸비했다면 태종은 더 없이 만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아들은 각자의 스타일에 집착하며 ‘너 죽고 나 살기’의 각축을 벌였다.


공식적으로는 승건이 아우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으로 판결되었다. 그러나 638년과 643년 사이에 두 황자 간의 반목이 한 쪽만의 책임이었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동생 쪽의 도발과 획책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전해진다. 결국 승건을 폐위한 후 태종은 반목의 당사자였던 둘째 아들(황후 소생 중)에게 태자 자리를 줄 수도 없었기 때문에 셋째 아들 치(治)를 책봉하여 후에 고종(高宗, 재위 649-683)으로 즉위하게 된다.


진-한 제국의 ‘그림자 제국’으로 흉노가 있었다면 수-당 제국에게는 돌궐이 있었다. 남북조시대에 북방의 큰 세력으로 유연(柔然)이 있었지만 치밀한 조직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6세기 중엽 신흥세력 돌궐이 유연을 격파하고 유목제국을 세운 것은 중국의 재통일 국면에 호응하는 변화였다. 초기의 흉노제국이 한나라에 우위를 점했던 것처럼 돌궐제국도 수-당 교체기에 당나라 건국세력을 포함한 군웅을 압도했다. 당 고조 역시 뇌물을 바치고 많은 이득을 약속하며 돌궐의 지원을 얻고 칭신(稱臣)까지 한 일이 있다. 당나라의 중원 수습이 마무리될 무렵인 622년 돌궐의 내침을 막기 위해 파견된 당나라 사신은 힐리(頡利) 가한(可汗)을 이런 말로 설득했다고 한다.


“중국과 돌궐은 풍속이 각기 달라 중국이 돌궐을 얻어도 신하로 삼을 수 없고, 돌궐이 중국을 얻는다고 한들 어디에 쓸 데가 있겠습니까? 또한 물자와 재물을 약탈하면 모두 장군과 병사들이 갖게 되니 카간(가한)께서는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것을 빨리 기병 부대를 거두어들이고 사신을 보내 화친을 하면 나라에서 반드시 많은 재물을 드리니 포목과 비단이 모두 카간에게 들어가 힘든 수고를 없애고 앉아서 이익을 얻는 것만 못합니다. 당나라가 이전에 천하를 차지할 즈음 카간과 형제가 되기를 약속해서 사람들이 서로 왕래한 것이 끊인 바가 없습니다. 카간께서 이제 선한 마음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을 따르시면 많은 것을 버리고 적은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책부원구> 660, 정재훈 <돌궐유목제국사>(사계절, 2016) 312-313쪽에서 재인용)


이 무렵 당나라 조정에서는 돌궐의 위협을 피하기 위한 천도(遷都) 논의까지 있었다 한다. 태종 즉위 직후 돌궐이 장안까지 쳐들어왔을 때 태종이 시종들만 데리고 강가로 나가 강을 사이에 두고 힐리 가한을 꾸짖은 끝에 화의를 맺고 철군시킨 장면이 그의 담력을 돋보여주는 이야기로 전해진다. 돌궐의 군사력은 당시 당나라 제국체제에 최대의 위협이었고 돌궐과의 소통능력은 태종의 황제 노릇에 큰 밑천이었다. 태자 승건에게도 그 밑천을 키우도록 부추겼을 것 같다. 그러나 4년 후 힐리 가한을 생포하여 돌궐제국을 무너트린 뒤에는 돌궐 문제의 우선순위가 밀려남으로써 태자의 비극이 빚어진 것이 아닐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