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唐 太宗)이 즉위한 지 16년째 되는 642년에 광주(廣州) 도독 당인홍(黨仁弘)의 독직 사건이 불거졌다. 비리의 규모가 커서 사형에 해당한다는 대리시(大理寺)의 판결이 황제에게 올라왔다. 

 

이 사건이 주목을 받은 것은 당인홍이 개국공신이고 태종의 신뢰가 두터운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수(隋)나라 장군으로 있다가 당 고조(高祖)의 기병 직후에 휘하 군대를 끌고 귀의해서 당나라의 천하통일 과정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다. 지방 장관으로 실적도 좋았다.

 

황제의 결정은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였다. 판결대로 처형하든지, 아니면 황제의 사면권을 발동하든지.

 

그런데 태종은 별난 반응을 보였다. 대리시의 상주문을 다섯 차례나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가져오라느니, 이제 밥 먹을 참이니까 그 뒤에 가져오라느니. 결국 받아보고는 이튿날 새벽 5품 이상 신하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라의 법이란 하늘이 내려준 것인데 이제 내가 한 차례 이를 어기고자 한다. 당인홍의 죄가 커서 사형에 처하는 것이 마땅한데, 조정에 대한 그의 공로가 큰 것을 생각해서 파관(罷官)에 그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법을 어지럽히고 하늘의 뜻을 저버리는 짓이다. 이에 나는 나 자신에게 벌을 내려 남교(南郊)에 멍석을 깔고 사흘 동안 검소한 식사를 하루 한 차례씩 하며 근신하고자 한다.”

 

신하들이 꿇어 엎드려 황제가 그런 자책을 하지 말기 빌며, 그 뜻을 거두지 않으면 자기들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다. 방현령(房玄齡)이 대표해서 아뢰었다. “자고로 인신의 생사는 어떤 사안을 막론하고 황제의 권한입니다. 황제가 조서를 내리면 그것이 곧 법률입니다. 황상께서 스스로에게 죄를 내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벽부터 엎드린 신하들이 오후까지 버티자 결국 태종이 물러섰다. 물러서면서 자신의 세 가지 허물을 밝히는 조서를 발포했다. “첫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것. 둘째, 사사로운 정으로 법을 어지럽힌 것. 셋째, 상 주고 벌 주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이 세 가지 잘못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전력을 다할 것이니 그대들은 간쟁(諫諍)을 삼가지 말라.”

 

결국 살리고 싶은 사람 살렸으니 한 차례 쇼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쇼에도 정치적 의미와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한 번 살펴보자.

 

첫째, 공신 집단에 보낸 경고. 천하 평정이 끝난 지 십여 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특권층으로서 공신 집단이 잘 나가고 있을 때였다. 황제가 사면권 자동발매기처럼 보였다가는 황제의 초법적 위상을 공신 집단이 공유하는 결과가 된다. 태종의 자책 쇼 앞에서 당인홍과 일체감을 가진 공신들은 깊은 고마움과 함께 두려움을 또한 느꼈을 것이다. 고마움과 두려움이 합쳐진 감정, 그것을 옛날 신하들은 ‘황송(惶悚)’이라고 표현했다.

 

둘째, 법치의 의지 확인. 당인홍 사건이 터진 것은 정관률(貞觀律)을 반포한 지 5년 되었을 때였다. 정관률에 앞서 수 문제(文帝)의 개황률(開皇律), 양제(煬帝)의 대업률(大業律), 그리고 당 고조(高祖)의 무덕률(武德律)이 있었다. 수-당 제국의 통일에서 영토 통합 못지않게 중요한 과제가 보편적 질서의 확립이었고 그를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일이 법체계, 특히 형법체계의 정비였다. 당나라 제국 체제의 첫 번째 특징으로 율령(律令)제를 꼽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수 문제 이래 황제마다 법전을 반포했던 것인데, 태종의 정관률은 한 차례 법전의 완성으로 평가받는다. 고조의 무덕률까지는 기존 율령을 조금씩만 손보아 즉위 초에 서둘러 반포한 것이었는데 태종은 오래 갈 율령을 만들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기 때문에 즉위 후 10년을 들여 정관률을 만든 것이다. 태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처남인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더 세밀한 법전을 편찬하게 하여 자기가 죽은 후 당률소의(唐律疏議)가 나오도록 했다. 당률(唐律)은 여기서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법치(法治)’를 이야기할 때, 법이 통치의 수단이 아니라 통치의 주체가 될 때, 즉 “법으로 다스리는” 정치가 아니라 “법이 다스리는” 정치가 진정한 법치라고 하는 논설을 종종 본다. 나는 이런 관점을 하나의 유토피아적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는 사람이 하는 것인데, 사람 밖의 제도에 매달려 정치의 완벽한 해결을 바라는 풍조를 나는 일종의 물신주의(fetishism)로 본다. 

 

현실 속에서 법은 황제에게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태종은 법을 하늘이 내리는 것이며 황제는 그것을 전하는 역할이고 황제 자신도 그를 어겨서는 안 된다는 자세를 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현대 민주국가에서도 용인되는 국가원수의 사면권을 그토록 조심스럽게 다룬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법치의 구현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