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효문제는 499년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발레리 한센은 <열린 제국(The Open Empire)> (2005)에서 그가 환갑까지 살았다면 남북조 통일이 그의 재위 중에 이뤄지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역사에는 가정(假定)이 없다지만, 그가 추진하던 과감한 개혁, 그리고 그의 사후 북위의 혼란을 생각하면 그럴싸하게 여겨지는 추측이다.


효문제를 이은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는 낙양 건설 등 중국화 정책을 계속 추진했지만 풍 태후나 효문제와 같은 영도력은 사라졌다. 그나마 선무제가 33세 나이에 죽고 여섯 살 나이의 효명제(孝明帝, 재위 515-528)가 즉위하고는 새 체제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층의 동요를 더 이상 억누를 수 없게 되었다.


풍 태후와 효문제가 추진한 변화는 혁명 수준의 체제 변혁이었다. 30여 년간 강력하게 추진된 이 변혁의 마무리 단계에서 북위 조정이 영도력을 잃은 것은 큰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회복 수단을 없앤 것과 같은 꼴이었다. 수술의 부작용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문제가 524년 6진(六鎭)의 난으로 드러났다. 비교적 안정된 통치체제를 오랑캐 왕조가 중국 땅에 세운 것을 흔히 ‘호-한(胡漢) 2중 체제’라 부른다. 부족사회 질서와 중국식 관료제를 병행하는 것이다. 바필드는 이 2중 체제를 동북방에서 모용부 왕조(전연, 후연 등)가 장기간에 걸쳐 개발한 것으로 본다. 동북방에는 유목 외에도 농경, 수렵, 채집 등 다양한 생산양식이 혼재했기 때문에 이 지역 왕조의 효과적 경영을 위해서는 여러 형태의 사회를 포용하는 다중 체제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이다.


북위의 탁발부는 같은 언어를 쓰는 선비족이기 때문에 모용부의 경험을 쉽게 수용했을 것으로 바필드는 본다. 4세기 말 북위가 일어날 때는 모용부 왕조가 혼란에 빠질 때였으므로 모용부의 고급 인력이 탁발부로 많이 넘어갔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북위는 410년까지 모용부 지역을 평정한 다음 근 20년이 지난 뒤에 서남방으로 확장을 시작해 몇 해 안에 북중국 통일에 이르는데, 이 20년이 모용부의 2중 체제를 배우고 익히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호-한 2중 체제에서 군사 방면은 ‘호’의 원리로, 행정 방면은 ‘한’의 원리로 운영된다. 군사와 행정의 분리에 따라 농민이 군대의 폭력에서 보호받고 조정의 조세 수입이 안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에게서 농민 괴롭히는 특권을 빼앗으면 무슨 재미가 남는가? 군대를 거느리는 오랑캐 귀족들은 행정을 맡은 한족 관료들에게 박탈감을 느꼈을 것이다.


풍 태후와 효문제의 변혁은 2중 체제를 넘어 1원적 중국화를 향한 것이었으므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천하 통일이라는 그 변혁의 목표를 향해 대대적 남방 정벌에 나섰다면 군대의 역할이 생겨 불만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효문제 사후 20여 년 동안 정치 혼란으로 다음 단계로의 진행이 늦어지면서 군대와 군사귀족의 불만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터져 나온 것이 6진의 난이었다.


6진의 난을 계기로 조정의 영도력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북위는 군벌의 각축장이 되었다. 528년 19세 나이의 효명제가 독살당한 뒤로는 권신들의 폭정이 이어지다가 결국 534년 서로 다른 황제를 내세우는 권신들에 의해 나라가 둘로 쪼개지기에 이르렀다. 낙양의 고환(高歡) 세력은 동위(東魏), 장안(長安)의 우문태(宇文泰) 세력은 서위(西魏)가 되었다. 동위는 550년, 서위는 556년까지 명목상의 황제를 받들고 있다가 고환과 우문태의 아들들에게 제위를 넘김으로써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왕조가 바뀌었다.


동위-북제는 효문제 이래의 중국화 노선을 지킨 반면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의 전통을 회복시키는 분위기 속에 새로운 정치실험이 진행되었다. <주례(周禮)>의 고제(古制)를 부활한다는 명분 아래 새로운 형태의 군사국가를 만드는 방향으로, 가장 두드러진 성과가 부병제(府兵制)였다. 군사(호)-농사(한)를 분리하던 호-한 2중 체제의 원리 대신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조직 원리를 도입한 것이다. 호-한 2중성을 병행시키던 종래의 2중 체제에서 양자를 전면적으로 결합하는 단계로 나아간 것이다. 북주가 북제와의 경쟁을 이겨내고 그 중심세력이 수-당 지배세력으로 이어지면서 천하제국을 건설하는 데 이 부병제가 큰 발판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서위-북주에서는 선비족이 중국식 성을 취하게 했던 효문제의 정책을 뒤집어 선비족이 원래의 성으로 돌아갈 뿐 아니라 한족 관리와 장군들에게도 선비족 성을 하사하는 정책을 취했다. 몇 십 년 사이에 성이 이쪽으로 바뀌었다가 저쪽으로 바뀌는 일이 거듭되다 보니 서위-북주의 지배세력을 놓고는 성씨만 보고 한족 집안인지 선비족 집안인지 판별하기 어렵게 되었다. 수나라 황실의 양(楊)씨와 당나라 황실의 이(李)씨가 과연 한족인지 선비족인지 시비가 끝없이 이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500년경의 아시아 정치지도 

 

16국 시대 5호의 활동 방향 

 

16국 시대 한인(漢人)의 이주 방향 
부견의 소상과 왕맹의 초상. 유비와 제갈량의 재현을 떠올리며 두 사람을 추앙하는 이들이 많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