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부견의 제국이 무너진 후 북중국 일대는 군웅할거의 양상으로 일단 돌아갔지만 그 혼란은 길게 가지 않았다. 30여 년 후 선비족 탁발부(拓拔部)의 북위(北魏)가 북중국을 다시 통일했다. 북중국에 왕조를 세우는 오랑캐들도 이제 중국식 정치이념에 따른 국가 경영에 익숙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족이 중국 기록에 처음 나타난 것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인 45년, 흉노와 함께 변경을 습격했다는 기사다. 흉노제국이 무너진 후 그에 복속했던 부족들과 주변 부족들이 그 빈 자리를 채웠는데, 동쪽에 선비가 있었고 서쪽에 오환(烏桓)이 있었다. 


선비족은 후한 말에 두 차례 걸출한 지도자 아래 뭉쳐 큰 세력을 이뤘다가 도로 흩어졌는데, 5호16국 시대에 선비의 여러 부족이 따로따로 왕조들을 세웠다. 4세기 중에는 전연(前燕), 후연(後燕), 남연(南燕), 서연(西燕) 등 모용부(慕容部) 왕조들이 활발하다가 4세기 말부터 탁발부(拓拔部)의 북위(北魏)가 세력을 일으켜 430년대까지 북중국을 통일했다.


북위의 중국화는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 때의 일로 흔히 얘기되지만 일찍부터 그런 경향을 보여준 두 가지 일이 있다. 하나는 제위의 부자 계승이다. 도무제(道武帝, 386-409)부터 효명제(孝明帝, 515-528)까지 8대가 연속 부자 계승으로 이뤄졌다.(손자가 이어받은 한 차례 포함) 힘과 능력에 따라 후계자를 결정하는 유목사회의 일반적 관습을 북위는 초기부터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398년의 평성(平城) 건설이다. 지금의 산시(山西)성 다퉁(大同)시 지역에 계획도시를 만들고 30만 명의 한족을 이주시켜 약 1천 평방킬로미터의 농지를 경작시켰다고 한다. 이런 규모의 황도를 만들어 관료집단과 다양한 서비스 인력을 수용했다는 것은 진-한 제국과 같은 성격의 제국체제를 바라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평성은 강우량이 당시 기술 수준으로 농경의 한계선에 있는 곳인데, 오랑캐 왕조의 정책이 농경지역 확장을 바라보았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북위의 중국화를 완성한 인물로 풍(馮) 태후(441-490)와 효문제가 꼽힌다. 풍 태후는 문성제(文成帝, 재위 452-465)의 황후로 문성제 사후 헌문제(獻文帝, 재위 465-471)와 효문제의 조정을 장악하고 개혁을 주도했다. 가장 중요한 제도 개혁은 균전제(均田制)와 삼장제(三長制)였다. 균전제는 농민에게 농지를 보장해줌으로써 제국의 농업 기반을 다지는 제도였고, 삼장제는 5가(家)를 1린(隣), 5린을 1리(里), 5리를 1당(黨)으로 하여 사회를 일률적으로 조직하는 제도였다.


풍 태후가 한족이기 때문에 중국화에 몰두한다는 비난이 당시에 많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출신을 보면 그냥 한족이 아니었다. 그는 북연(北燕) 황실 출신이었는데, ‘연’이란 왕조 이름은 원래 선비족의 모용부에서 쓰던 것이다. 풍 태후의 조부 풍발(馮跋)이 모용부 지역에 살며 후연 황제 모용보(慕容寶)의 양자 고운(高雲)과 친교를 맺었는데, 모용보의 동생 모용희(慕容熙)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를 죽이고 고운을 황제에 앉혔다가 2년 후 고운이 살해당하자(409) 풍발이 제위를 이었다. 5호가 북중국을 주름잡는 가운데 오랑캐의 중국화와 중국인의 오랑캐화가 나란히 진행되었는데, 북연의 풍 씨는 후자의 대표적 사례였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더라도 풍 태후는 대단히 흥미로운 캐릭터다. 문성제가 죽었을 때 유물을 태우는 불길 속에 돌연 뛰어들어 주변사람들이 겨우 구해냈지만 여러 날 사경을 헤맸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염문이 떠돈 총신(寵臣)이 여럿 있다. 그런데 그 총신들은 하나같이 태후에 대한 충성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아들 헌문제와 손자 효문제도 재미있는 사람들이다. 헌문제는 12세에 즉위했다가 18세에 다섯 살 된 아들 효문제에게 양위하고 23세에 죽었다. <위서(魏書)>와 <북사(北史)> 등 정사에 대단히 훌륭한 능력과 성품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실이 그랬던 것 같다. 양위하여 태상황이 된 뒤에도 유연(柔然) 정벌에 나서는가 하면 풍 태후의 개혁정책에 앞장서기도 했다. 왜 그가 일찍 양위를 해야 했는지 이해할 열쇠를 찾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죽음이 풍 태후의 독살이었다는 소문도 떠돌게 된 것 같다.


효문제는 다섯 살에 즉위해 20년 가까이 할머니 그늘에서 지냈으니 웬만한 사람이라면 반감이나 싫증을 느낄 텐데, 웬 걸, 풍 태후가 죽은 후 중국화 정책을 더 강력하게 추진했다. 494년에는 호복(胡服)을 한복(漢服)으로 바꿔 입게 하더니 2년 후에는 성(姓)까지 중국식으로 바꾸게 했다. 황실의 성부터 탁발에서 원(元)으로 바꿨다. 아무리 중국화가 필요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자기 성까지 바꾸다니, 지나친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과감한 조치였다.


또 하나 효문제의 중요한 중국화 조치는 낙양(洛陽) 천도였다. 398년의 평성 건설만 하더라도 호족 왕조로서 획기적인 중국화 조치였는데, 백년이 지난 이제 중국의 전통적 중심지에 아예 들어앉기로 한 것이다. 권력의 근거지를 뒤바꾸는 이 조치에는 전통세력의 반발이 워낙 컸기 때문에 493년에 남조 정벌을 핑계로 낙양으로 군대를 끌고 왔다가 해를 넘긴 다음 천도를 선포했다. 이제 북위 왕조는 ‘중국식 왕조’를 지나 ‘중국 왕조’가 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