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내신 책 <결: 거침에 대하여> 잘 읽었습니다. 대개 한 꼭지씩 나올 때 읽었던 글이지만 묶여 있는 것을 보니 새로 생각나는 것이 많군요. 


얼마 전 어느 광역단체의 인권위원회 참여를 제게 권하신 일이 읽는 중에 때때로 생각났습니다. 저는 고사했지요. “저처럼 ‘인권’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인권위원 노릇을 하겠습니까?” 그래도 형님은 권유를 거두지 않았지요. “인권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가진 이들이 두루 참여해야 균형 잡힌 위원회가 되지 않겠어요?”


형님과 저는 공유하는 생각도 많지만 달리하는 것도 꽤 있습니다. 인권도 하나의 예지요. 근대세계에서 인권이 부각된 것을 저는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봅니다. 그 현상이 사람들의 삶에 도움이 된 면이 클 때도 있었지만, 근년에는 악용되는 면이 더 커졌다고 보지요. 


책 끝의 글 “인간의 존엄성과 보편복지”를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이란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인간성’ 잘 지킬 필요는 느끼지만 ‘존엄성’이란 표현이 왜 필요한지는 납득하지 못합니다. 꼭 존엄해야만 보호받을 가치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이 ‘존엄성’이 인간 아닌 다른 존재들과의 비교를 함축하는 건가요? 길가의 개똥이나 잡초보다 인간이 더 존엄하다는? 저는 이게 아주 위험한,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근대병’의 한 증상이 아닐까 걱정합니다. 인간이 너무 존엄하다 보니 자연과 편안히 어울릴 수가 없어요. 자연, 그리고 그 속의 모든 존재를 착취 대상으로만 여기는 근대인의 자세로부터 핵 위협에서 자원, 환경 문제까지,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문제들이 파생된 것으로 봅니다.


존엄하지 않더라도 생긴 대로 인간의 모습인 ‘인간성’에 지킬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 줬는지 모를 ‘행복추구권’의 주장에서 인간성의 왜곡이 시작된다는 생각이에요. 상황에 따라 행복도 느끼고 불행도 느끼며 사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고 행복의 조건만을 획득하려 할 때 다른 인간에게서 그 조건을 빼앗으려 들게 되지요. 그리고 자연을 과도하게 착취하려 들게 됩니다. 인간만의 존엄성에 집착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기를 거부하는 선언이 바로 ‘행복추구권’이라고 저는 봅니다. 모든 권리에는 의무가 따르는 것이 자연의 이치인데, 의무 없는 권리만을 내세우는 인권 관념의 유행을 저는 하나의 병리적 현상으로 봅니다. 몸의 균형을 잃는 것이 질병인데, 생각의 균형을 잃는 것은 정신병이겠지요.

20 대 80의 대비에도 이 균형감각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산, 소득, 교육 등 외적 기준에 따른 ‘차별’에 형님은 분노하지요. 그러나 세상을 보는 관점의 건전한 균형감각을 기준으로 하는 ‘구별’은 필요합니다. 그런데 유리한 외적 기준을 가진 사람들은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균형감각을 갖추기 쉬운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근대 이전의 신분제에 나름의 장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와 사회의 정책을 시야 넓은 사람들이 결정할 수 있었으니까요.


물론 좋은 외적 기준과 넓은 시야를 가지고도 그것을 자기 욕심 채우는 데만 이용하는 인간들이 있지요. 그런 악인이 좁은 범위에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그런 경향을 가졌습니다. 저는 성선설과 성악설, 양쪽 다 일면의 타당성을 가진 것으로 봅니다. 좋은 정치란 인간성의 선한 측면을 북돋우고 악한 측면을 억누르는 것이겠지요.


좋은 정치를 위해 우월한 조건을 가진 집단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큰 힘을(정보력, 사고력, 실행력) 가졌기 때문에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그 파급력이 크니까요. 이 집단을 지배계급으로 부를 수도 있고 지도층(엘리트)이라 부를 수도 있는 것인데, 저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으로 ‘유력(有力)계층’을 씁니다.


서양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이념이 자라나기는 했지만 유력계층의 순화와 통제에는 동양 쪽에서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기>에 “형벌은 대부에게 미치지 않고(刑不上大夫) 예법은 서인에게까지 내려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는 말이 있지요. 대부, 즉 유력계층에게 형벌이 면제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 불평등한 신분제로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무리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대부가 형벌에 처해진 사실은 역사기록에 얼마든지 있어요. 형벌에 관련된 행동은 대부의 신분과 무관한 것이고, 그 신분과 관련해 의미 있는 행동은 예법의 규제를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무력계층은 형벌의 규제만 받았지만 유력계층은 그에 더해 예법의 규제까지 받았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전국시대 어느 나라 재상이 자기 집 베틀을 부수고 채마밭의 채소를 뽑아버렸다는 일화가 있지요. 유력계층이 백성(무력계층)과 이익 다투기를(與民爭利) 꺼리는 전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상에서도 공직자 윤리를 따지기는 하지만 전통시대처럼 엄격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공직자에게 유죄 입증의 책임이 기소자에게 있다면, 전통시대의 공직자에게는 무죄 입증의 책임이 피소자에게 있었던 셈입니다. 유력계층은 제도로 규정하지 않아도 어느 사회에나 저절로 형성되는 것인데, 현대 ‘평등’사회의 유력계층은 제도의 굴레를 벗어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자기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는 무력계층의 정치적 태도를 ‘계급 배반’으로 지적하시는데, 유력계층에게도 계급 배반의 경향이 있습니다. 유력계층은 주어진 사회 상황에서 많은 혜택을 얻는 입장이므로 사회 상황의 유지, 즉 안보를 위해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이익을 위해 계층의 임무를 등지는 사람들이 늘 있습니다. 공익(公益)과 사익(私益)의 충돌이지요. 공익을 증진하고 사익을 억제하는 것이 언제나 정치의 큰 과제였습니다.


고려가 원나라의 영향 아래 있던 때가 우리 역사에서 사익의 창궐이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개인이건 기관이건 힘 있는 자들이 토지와 인민을 마음껏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국가의 조세원이 쪼그라들었지요. 세력가들이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와 인민을 풀어내는 ‘전민변정(田民辨整)’이 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새 왕이 즉위하면 으레 이 정책을 한 차례씩 추진했는데, 대개는 한두 해 동안 구 세력의 전민을 빼앗아 왕 주변의 신흥세력이 차지하고 나면 흐지부지되는, 일과성 행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임금의 사익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공민왕에 이르러 전민변정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책의 추진에는 저항이 클 수밖에 없었지요. 공민왕이 정신병에 걸려 측근의 손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조선 건국세력이 고려 왕조의 자체적 개혁 노력을 폄훼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조선 건국의 기초가 된 과전(科田) 제도는 공민왕의 전민변정 정책의 성과 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이지요.


공민왕에 앞서서 전민변정 정책의 강력한 시도가 한 차례 있었습니다. 고려 왕이 아니라 정동행성의 원나라 관리 활리길사(闊里吉思)가 1301년에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입니다. 당시 고려에서는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쪽이 노비면 자식을 노비로 정하는 제도였는데, 노비의 인구 비율을 늘리는 만큼(노비는 국가가 아니라 주인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므로) 국가 기반을 무너트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었지요. 활리길사는 노비 판정에 ‘일량위량(一良爲良)’의 기준으로 노비 수를 줄이는 정책을 꾀했답니다. 그러자 고려 조정에서 그의 소환을 원나라에 주청해(고려 습속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개혁정책이 중단되었습니다.


원나라 관리가 고려 사회의 파탄을 막으려 애쓴 반면 고려 지배집단은 이에 저항한 이런 일이 어째서 일어난 것일까요? 원나라에 예속된 상황에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길은 원나라에서 정해주니까, 자기네는 이익 챙기는 데만 전념한 거죠. 자기 사회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마음이 없는 풍조, ‘식민지 근성’의 제일 더러운 측면입니다.

이제 어떤 얘기로 넘어갈지 짐작이 가시죠? 백년간 원나라에의 예속이 고려 지배집단을 타락시킨 상황과 지금 한국 상황을 비교하려 합니다.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를 ‘몽골간섭기“라 부르지요. 원나라의 영향력을 약하게 표현함으로써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아큐(阿Q)식 발상은 안쓰럽지만, 20세기 한국 상황에 비교한다면 ’간섭‘ 정도 표현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간섭 초기 일본 정벌 추진할 때를 빼면 군대 주둔이 없었고, 정동행중서성이라는 원나라 기관도 20세기 전반기의 총독부보다는 후반기의 한미연합사나 미국대사관에 가까운 것이었으니까요.


20세기 전반기의 조선과 후반기의 남한은 몽골간섭기의 고려보다 더 심한 외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식민지 근성이 배양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지요. 인류사회의 미래든 국가사회의 미래든 자기가 속한 사회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우리만큼 적게 하는 나라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주어진 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 내 몫 챙기는 데만 열중하는 정글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한 걱정에서 ‘진보’가 나왔습니다. 주어진 체제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입니다. 사회의 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노력입니다.


‘진보’가 바로 ‘빨갱이’로 몰리던 시절에 비해 진보 운동이 크게 발전해 온 것은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현실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힘을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함께 가진 이들은 진보 운동의 약점으로 물적 자원의 부족을 먼저 생각하는데, 저는 그보다 이념적 자원의 부족을 더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현실 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을 분석하는 도구 자체가 오염되어 있어서 혼란을 일으키고 설득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예컨대 중요한 진보적 가치로 꼽히는 ‘자유’, ‘평등’ 같은 이념들이 자본주의체제의 확산-강화 과정에 이용되는 동안 불건전한 함의(含意)를 많이 품게 된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조선인의 70퍼센트가 사회주의를 원한다고 하는 1946년 8월 미 군정청의 여론조사 결과를 <해방일기>에서 뽑았다고 명기해서 인용하셨군요.(119쪽) 당시 민의의 표현이 ‘사회주의’였지요. 그 표현을 형님은 생산수단의 공유화(자본주의의 사유화와 공산주의의 국유화에 대비해서)를 지지하고 “막연하게라도 평등의 가치와 더불어 사는 사회를 사회주의에서 찾았다”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그 해석에 대체로 찬성하면서도 ‘사회주의’라는 용어의 표현의 한계는 어차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인들이 가진 표현 수단도 1946년의 서울 시민들보다 크게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계몽주의시대 이래 서양에서 나온 개념들에 묶여 있습니다. 이 개념들의 의미를 지금 시대에 맞게 조정하는 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인권’이라 해서 일방적 권리만을 내세운다면 눈앞의 인권 유린을 제지하는 미시적 효과는 있더라도 인권이 저절로 자라나고 꽃필 수 있는 풍토를 오히려 해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를 인간의 도리(道理) 속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도리는 무엇보다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겠지요.


나이 70을 넘기고도 형님께 “형님” 소리가 스스럼없이 나오는 큰 이유가 이념의 조정이라는 과제를 놓고 계속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움의 내용은 생각의 모양에 있는 게 아니라 “결”에 있는 것이지요. 겉으로 드러나는 생각의 모양은 형님과 저 사이에 차이가 큽니다. 그러나 성실함과 공손함이 어우러진 형님의 결 속에서 생각 다듬어나가는 길을 찾습니다. 새로 내신 책을 놓고 가르침에 새삼 감사드립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