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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는 한나라와 함께 중화제국을 대표하는 왕조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 지금은 ‘중국’을 뜻하는 접두사로 ‘한(漢)’ 자가 많이 쓰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당(唐)’ 자도 그 못지않게 쓰였다. 세계 각지의 차이나타운이 ‘당인가(唐人街)’로 흔히 불리고 서울의 ‘당인리’도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당’ 자를 쓴 것이다.


당나라는 중화제국의 판도를 크게 넓혔을 뿐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도 매우 활발해서, 중국사만이 아니라 세계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제국의 하나로 꼽힌다. 그런데 당나라가 과연 ‘중화’ 제국이 맞는지 의문이 있다. 북중국을 통일해서 남북조시대를 연 북위는 선비족의 왕조였는데, 당 황실은 북위 중심세력에서 출발한 가문이기 때문에 오랑캐 혈통을 의심받는 것이다. 이 의심이 근년 더욱더 굳어져가고 있는데, 바로 이 잡종성(雜種性)에 당 제국의 위대함이 뿌리를 둔 것이 아닌가, 많은 연구자들이 경탄하고 있다. 이번 회에는 이 잡종성이 빚어져 나온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5호16국의 초기 왕조들은 국가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역 군벌 수준의 세력들이었다. 한나라 제국체제 안에서 자치권을 누리며 결집력을 갖고 있던 집단들이 진(晉)나라 통치체제가 무너진 공백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안정된 통치 태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랑캐 왕조들도 중국식 정치이념을 습득하며 통치의 시간적-공간적 확장을 꾀하게 되었다.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338-385, 재위 357-385)은 370년대에 북중국을 통일하고 383년에는 천하 통일을 꾀하는 남방 정벌에 나서기까지 했다. 


부견의 저(氐)족은 한나라 때부터 칭하이(靑海)-신장(新疆)-간수(甘肅)성 경계 지대에서 거주하다가 서진(西晉)이 무너지고 북중국이 혼란에 빠진 후 갈(羯)족의 후조(後趙)에 복속했다가 나중에 그 지도자 부홍(苻洪)이 남방에 있던 동진(東晉)의 정북장군(征北將軍)-기주자사(冀州刺史)로 임명받았다. 5호 중에서 중국화가 많이 진전된 편이었다.


부견의 조부 부홍이 동진의 관직을 받으며 한편으로 자립해서 삼진왕(三秦王)을 자칭하다가 350년 죽은 후 이어받은 백부 부건(苻健)이 352년 황제를 칭했다. 부건이 355년 죽은 후 그 아들 부생(苻生)이 제위를 물려받았으나 2년 후 부견이 몰아내고 제위를 빼앗았다.


5호의 지도자 중 부견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많이 남아있는 편이고, 그를 통해 부견의 중국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8세 때 할아버지에게 “공부를 하고 싶으니 스승을 붙여 달라”고 조름에 부홍이 “우리 집안은 애쓰는 것이 고기 먹고 술 마시는 것뿐인데 네가 별나게도 공부를 하겠다니 신통하구나.” 웃으며 승낙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제위를 빼앗는 경위도 ‘중국적’으로 각색되어 전해진다. 사촌형 부생은 걸주(桀紂)를 방불하는 잔인한 폭군으로 그려지고, 끝내 부견까지 해치려는 위기에 몰렸을 때 주변사람들에게 이끌려 부득이하게 ‘기의(起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황으로 볼 때 부생은 조상들의 뒤를 이어 그저 고기 먹고 술 마시는 데 애썼을 뿐인데, 부견이 중국적 정치이념에 입각한 별난 국가관을 갖고 새 세상 만들러 나선 것 아닐까싶다.


부견의 중국화 성향을 체현한 인물이 왕맹(王猛, 325-375)이었다. 왕맹은 빈한한 한족 가문 출신으로 학업에 전념하며 지내다가 31세에 부견을 만나 경륜을 펼치기 시작했다고 하니 제갈량과 유비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부견이 355년에 왕맹을 만나 2년 후 제위를 탈취할 때까지 그의 지략을 얻었다고 하는데, 왕맹의 지략은 권력 탈취에 이르는 파워게임보다 탈취 후의 체제 구상이었을 것 같다. 부견 즉위 후 왕맹의 큰 업적 하나가 포악한 귀족 20여 명을 처형한 것이니, 백성을 수탈하는 중간 권력을 제거하고 수탈을 국가가 독점하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든 것이 왕맹의 체제 구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견 즉위 후 불과 20년 내에 북중국 통일을 이룬 데는 항복을 관대하게 받아들여 체제를 확장하는 정책이 효과를 본 것 같다. ‘제국’ 부활의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부견의 속성(速成) 제국은 기반을 충분히 다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383년 동진 정벌에 나선 부견의 군대는 조직력이 약한 연합군의 성격이었고, 비수(淝水) 전투 패배로 틈을 드러내자 복속했던 많은 세력이 이탈하면서 제국이 무너지고 말았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