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에서 농경사회와 유목사회의 관계를 나란히 움직이는 두 개 수레바퀴보다는 자전거의 앞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나는 본다. 자전거가 나아가는 동력은 하나의 바퀴에서 일어나고 다른 바퀴는 그에 끌려가거나 밀려가는 것이다. 중국문명 발전의 동력은 농경사회의 잉여생산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전거의 앞바퀴에는 동력을 일으키는 기능이 없지만 균형을 유지하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 불가결한 역할이 있다. 중국사의 진행에서 유목사회의 역할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농경문명 발전과 확장의 ‘변경(frontier)’ 역할이다. 

 

아직도 중국 오지 곳곳에는 선사시대 이래의 원시적 생산-생활 방식을 지키고 있는 소수민족이 있다. 특수한 자연조건에 의지하는 생산-생활 방식이다. 유목이 필요로 하는 자연조건은 농경문명의 확장에 적합한 편이다. 기온과 강우량의 차이를 빼면 농경이 가능한 광대한 평지가 유목지대에 남아 있는데, 기술 발전에 따라 농업지대가 건조 지역과 한냉 지역으로 계속 확장되어 왔다. 그리고 유목민은 상당 규모의 조직 활동 경험을 갖고 있어서 조건 변화에 따라 농업국가 체제에도 비교적 쉽게 편입할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 유목사회 연구의 개척자 오원 래티모어는 <중국의 내륙아시아 변경지대(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1940)에서 중국 주변 유목민의 존재양식을 ‘내경(內境, inner frontier)’과 ‘외경(外境, outer frontier)'으로 구분했다. 중화제국의 판도 안에 존재했는가 밖에 존재했는가 하는 차이다.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Perilous Frontier)>(1989)에서 이 개념을 발전시켜 유목사회의 농경국가에 대한 태도를 ’내경 전략‘과 ’외경 전략‘으로 구분했다. 

 

기원전 2세기, 한나라 초기의 흉노 제국은 외경 전략을 구사했다. 농경국가의 외부에 세력을 이루고 있으면서 교역, 약탈, 조공 등의 관계를 통해 농경국가의 잉여생산력을 흡수하는 전략이었다. 이 전략이 농경국가에게 지우는 부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커지는 경향이 있다. 유목사회의 소비수준 상승에 따라 요구가 갈수록 커지는 속도가 농경국가의 생산력 확장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원전 133년 이후 20년에 걸쳐 한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흉노 정벌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 무제의 정벌로 흉노 제국이 무너진 후 대다수 흉노가 한나라 판도 안에 들어온 후에는 내경 전략이 펼쳐진다. ‘귀순’한 흉노는 변경 방어 등 한나라의 안보에 공헌하는 역할을 맡으며 한나라 경제체제에 편입되는 것이다. 흉노 제국이 사라진 외곽 지역에는 오랑캐 세력들이 새로 형성되어 한나라에 대해 나름의 외경 전략을 취하게 된다.

 

흉노 제국이 무너진 4백여 년 후인 304년에 흉노족의 유연(劉淵)이 조(趙)나라를 열고 광문제(光文帝)를 칭하면서 5호16국 시대를 열었다. ‘5호’란 흉노와 갈(羯), 저(氐), 강(羌), 선비(鮮卑)의 다섯 종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연이 이끈 흉노는 한나라에 귀순해 제국체제 안에서 내경 전략을 펼쳐 온 존재였다. 유연의 성(姓)도 한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다른 종족들도 한나라가 느슨하게 끌어들여 ‘외이(外夷)’ 아닌 ‘내이(內夷)’로 통제해 온 대상이었다. 한나라 말기부터 진나라의 280년 재통일에 이르기까지 백년 가까운 분열 시대의 군사적 수요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커졌고, 결국 제국체제의 전복에 이들이 앞장서게 된 것이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로마제국의 붕괴에도 오랑캐 용병집단의 역할이 컸다. 제국의 ‘대일통(大一統)’ 정신은 많은 이질적 요소를 제국체제 안에 끌어들이는데, 이 이질적 요소들이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체제의 붕괴를 유발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사마천(司馬遷)이 살았던 것은 대일통의 시대였고, 150년 후 반고(班固)가 살 때는 체제 붕괴의 위험이 느껴졌기에 ‘정통(正統)’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돌아서 있었던 것 아닐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