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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중국’은 “宅兹中国”의 중국 그대로도 아니고 중화인민공화국 그대로도 아니다. 언어, 습속, 사상, 문화, 제도 등 여러 요소들이 어울려 ‘중국적’이라고 인정할 만한 형체를 오랫동안 유지한 것을 ‘중국’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나타난 중국의 모습 중 가장 표준적인 것이 ‘천자국(天子國)’이다. 천자가 천명을 받아 천하 전체를 다스리되, 주변부는 여러 제후에게 나눠 맡기고 천자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를 중국이라 한 것이다.


진 시황의 ‘천하 통일’을 계기로 이 천자국의 틀이 바뀌게 된다. 춘추전국시대까지 천하의 구조는 5복(五服)의 구조로 파악되었다. 천자의 위치로부터 거리에 따라 전복(甸服),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이 동심원을 이룬다는 것이다. 천자의 집권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통제 수준이 여러 등급으로 나뉜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의 통일로 제국체제가 세워지자 제국 안의 화(華)와 제국 밖의 이(夷), 2분법이 지배적 관점이 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이 바로 제국체제를 세운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 이전의 분권세력인 제후국들을 파괴함으로써 기초공사는 한 셈이지만 제국체제의 건축물을 제대로 세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가 세운 천하제국이 십여 년밖에 버티지 못한 것이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와의 쟁패를 통해 한나라를 세웠지만(기원전 206) 그 또한 완전한 천하제국이 되지 못했다. 유방 말년까지(기원전 195) 이성(異姓) 제후를 정리한 데 이어 문제(文帝) 즉위 후 여씨(呂氏) 세력을 척결하고(기원전 180) 경제(景帝) 때 오-초 7국의 난(기원전 154)을 평정함으로써 제국의 내부 권력구조가 겨우 완성되었다.


기원전 141년 무제(武帝)가 즉위할 때 제국의 내부는 정비되어 있었지만 제국 외부와의 관계가 천하제국의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한나라 개국 이래 흉노와의 관계에서 수세에 몰려 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제는 기원전 133년부터 흉노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계속해서 기원전 111년과 110년에 다시 정벌군을 보냈을 때는 “수천 리를 가도 흉노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흉노 퇴치에 국력을 기울였다.


20년에 걸친 횽노와의 전쟁이 워낙 큰 사업이었기 때문에 다른 방면이 눈에 잘 띄지 않는데, 무제는 북쪽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즉위 직후에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한 것이 월지(月氏)와 연합해 흉노를 협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흔히 풀이되지만, 서역에는 서역대로 무제가 노력을 기울일 의미가 따로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조선(朝鮮), 남쪽으로 남월(南越)을 정벌함으로써 무제는 한 제국의 모든 주변부를 정리하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과 남월이 한 제국에서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큼 강한 세력을 이루게 된 것은 전국 말기에서 한초에 이르는 혼란 속에서 중국문명이 대거 유출된 결과였다. 남월은 진나라에서 파견한 남해도위(南海郡尉) 조타(趙佗)가 진나라가 망할 때 지금의 광둥성 일대에 자립해서 왕조를 열고 한나라와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은 기원전 195년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흉노에 투항할 때 동쪽으로 달아난 위만(衛滿)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나라가 기원전 111년 남월을 정벌하기에 이른 갈등의 뿌리는 철기(鐵器)의 밀수에 있었다. 당시 철기는 중국문명의 첨단제품으로, 경제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에 엄격한 통제 품목이었다. 그리고 그 2년 후 조선 정벌에 나선 첫 번째 이유는 조선이 주변 다른 세력의 조공을 가로막는다는 것이었다. 조공관계에 따르는 이득을 독점하면서 지역에 패권을 구축하는 것이 한나라의 천하체제 구축에 장애물이 된 것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조선과 남월이 한나라에게 문제가 된 이유가 중국으로부터 파급된 요소들에 있었다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