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15세 나이에 즉위한 무제가 본격적 흉노 공격을 시작한 것은 8년 후인 기원전 133년이었다. 그러나 흉노와의 관계에 변화를 꾀하려는 의지가 더 일찍부터 그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즉위 직후인 기원전 139년 장건(張騫, 기원전 164-114)의 월지 파견에 드러나 보인다. 25세의 근위대 장교 장건은 월지를 한나라 편으로 끌어들여 함께 흉노에 대항하도록 설득하는 사명을 띠고 장안을 출발했다. 


 한나라의 서북방, 지금의 간수(甘肅)성 방면에 있던 월지는 흉노의 유목사회 통합 이전에 가장 강성한 유목세력의 하나였다. 두만 선우가 묵특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일을 보더라도 당시 월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묵특의 흥기 이후 수세에 몰려 있다가 기원전 170년대에 흉노의 큰 공격을 받아 왕이 살해당한 후 월지의 주력이 서쪽으로 멀리 옮겨간 것을 대월지라 하고 일부가 남쪽 고원지대로 옮겨간 것을 소월지라 한다.


월지의 패망 30여 년 후에 장건을 사절로 보낼 정도로 한나라의 이 방면 정보가 어두웠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장건은 월지의 옛 땅을 헤매다가 흉노에 사로잡혀 10년간의 억류 끝에 기회를 보아 탈출했고, 탈출한 뒤 다시 월지를 찾아 서쪽으로 향했다. 멀리 아무다리야(옥수스)강 상류의 박트리아 지방에 정착해 있던 월지인들에게 흉노를 협공하자는 황제의 제안을 전했으나 그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장건은 월지에서 한나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흉노에 붙잡혔다가 기원전 126년 군신 선우가 죽은 후의 혼란을 틈타 다시 탈출, 사행을 떠난 지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장건은 10년간 억류되어 있는 동안 아내를 맞아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사서에 전해지는 내용만으로는 그가 처했던 상황을 깊이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 흉노사회에서 포획한 중국인을 단순한 노예 이상으로 활용하는 길이 있었기 때문에 생존을 넘어 생활까지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가 첫 번째 탈출한 기원전 129년은 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전면적 공격이 시작될 때였다. 그가 ‘탈출’해서 한나라로 바로 돌아오지 않고 서쪽으로 향한 것이 애초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였다고 사서에는 적혀 있지만, 흉노 측에서 상황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그에게 뭔가 역할을 주어 파견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로부터 3년 후 장건이 한나라로 돌아올 때 동행한 것은 호인(胡人) 시종 한 사람뿐이었다고 하니, 그의 거취를 설명할 근거는 그 자신의 진술 외에 거의 없었을 것 같다.


한나라에 대해서나 흉노에 대해서나 장건의 역할에 군사적 측면보다 경제적인 측면이 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파밀고원 서쪽에는 문명 수준이 높은 큰 경제권이 있었고 중국과의 교역이 작은 규모로 시작되어 있었다. 한나라는 흉노에 대한 군사적 공격과 함께 이 교역로 확보를 위한 노력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훗날 흉노세력을 제압한 뒤 한나라는 기존의 장성 이북으로는 지속적 관리를 시도하지 않았으나 서쪽으로는 서역도호부를 설치해서 지금의 신장(新彊) 일대를 강역에 편입시키면서 장성을 서쪽으로 연장해서 쌓기까지 했다. 


(발레리 한센은 <실크로드-7개의 도시>(류형식 옮김, 소와당 펴냄)에서 이렇게 말한다.(404쪽) “황제가 장건을 파견한 이유는 국방문제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무역 때문에 보낸 것이 아니었다. ... 항상 목적은 북방의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한센은 근년의 고고학 연구 성과를 활용해서 중국과 서역의 관계에 관한 좋은 관점을 많이 제시했지만 이 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제가 많은 인력과 자원을 투입한 실크로드 방면에는 보호가 필요한 농경사회가 없었다. 보호가 필요한 것은 교역이었다.)

허허벌판에 서 있는 장성 서쪽 끝의 가욕관. 이 요새는 1372년에 건축된 것이지만, 이 위치에 요새를 둔 것은 그보다 1500년 전, 한나라 때부터의 일이었다.

 

중국 역사부도의 한나라 강역. 하서주랑(河西走廊)을 거쳐 사막지대에 이르는 서역도호부 영역은 서역과의 교통로로서 군사적 관리의 대상이었다. 도호부의 면적은 한 제국 전체의 3분의 1이 넘어 보이지만 인구는 백 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흉노 제국’은 하나의 ‘그림자 제국’이었다. 해가 뜰 때는 길었다가 한낮이 되어 가면 짧아지고, 해가 기우는 데 따라 다시 길어지는 그림자의 속성을 이 그림자 제국도 가진 것이었다. 중화제국의 새벽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다가 제국의 중앙집권 체제가 완성되는 데 따라 스러진 것이 흉노 제국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