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패 중 오왕 합려의 행적이 특히 흥미롭다. 두 개의 두드러진 대목이 있는데, 하나는 왕이던 사촌동생 료(僚)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 또 하나는 그 9년 후 초나라를 거의 멸망시킨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두 대목에 모두 깊이 얽힌 인물이 오자서(伍子胥)였으므로 <<사기>> <오자서열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오나라 역사가 사서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합려의 할아버지 수몽(壽夢, 재위 기원전 586-561)부터인데 합려의 아버지 제번(諸樊, 기원전 561-548))이 그 장남으로 뒤를 이었다. 제번 후에 그 동생 여제(余祭, 기원전 548-531)와 여매(余昧, 기원전 531-527)가 뒤를 이었는데 여매 다음에 문제가 생겼다. 수몽의 넷째 아들 계찰(季札)이 굳이 왕위를 사양하는 바람에 여매의 아들 료에게 왕위가 넘어갔다고 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합려가 기원전 515년에 료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합려의 계승권 주장은 장자(長子) 상속의 원리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합려 이전의 오나라에는 그런 원리가 없었음을 그 숙부들의 왕위 계승이 보여준다. 

 

형제 계승에서 장자 계승으로 넘어간 변화는 국가 형태의 큰 발전이었다. 국가 규모가 작을 때는 권위보다 권력이 중요했다. 임금이 죽었을 때 나이어린 아들보다 장성한 동생이 역할을 이어받는 편이 나았다. 그러나 규모가 큰 국가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존중받는 권위가 임금 개인의 힘보다 더 중요해진다. 누가 더 힘이 세냐에 따라 이 사람도 될 수 있고 저 사람도 될 수 있는 애매한 기준이 아니라 이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천명(天命)의 확실한 소재를 밝혀야 한다.

 

상나라 세계(世系)에는 부자 계승보다 형제 계승이 압도적으로 많다. 반면 주나라는 장자 계승의 원칙이 확고했다. 공자가 주공(周公)을 성인으로 받든 큰 이유가 이 원칙의 확립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형인 문왕(文王)이 죽은 후 어린 조카 성왕(成王)의 섭정을 7년간 맡아 실제로 천자 노릇을 하면서도 신하의 자리를 지킨 것이 주공의 공로였다. 당시 새 왕조에 가장 큰 위협을 가한 것이 성왕의 다른 숙부들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었다는 사실로 볼 때 장자 계승의 원칙은 그때까지 확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보다 5백년 후까지 형제 계승이 시행되고 있었던 사실에서도 오나라의 후진성을 알아볼 수 있다. 이웃의 초나라는 왕을 칭한 지 2백년이 되어 문명국 행세를 하며 오나라를 깔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오나라의 국력이 급속히 자라나는 과정에는 선진국에서 넘어온 인재들의 역할이 컸다. 손무도 그런 인재의 하나였지만, 가까운 초나라에서 넘어온 사람이 많았다. 오자서처럼 원한을 품고 초나라를 떠난 사람들에게는 복수를 위해서도 경륜을 펼치기 위해서도 기술 수준이 낮으면서 잠재력이 큰 오나라가 매력적인 대안이었으리라고 이해된다.

 

오자서는 료왕에게 초나라를 공격할 뜻이 강하지 않음을 알자 합려를 위해 료왕을 암살하고 합려의 등용을 받았다. (암살의 선진기술도 가져온 모양이다.) 합려가 즉위 후 초나라에 적극적 공세를 취한 데는 군사적 긴장상태로 정치적 반대를 가로막고 대외적 성공으로 자기 왕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오자서는 자기 시대의 모순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초나라에서 달아난 지 20년 만에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수도를 함락시킨 그는 자기 아버지와 형을 억울하게 죽인 평왕(平王)의 무덤을 허물고 그 시신에 매질을 했다. 아무리 잘못이 있더라도 자기가 모시던 임금을 그토록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은 춘추시대의 윤리에서 벗어난 짓이었다. 전국시대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행위였다.

 

오자서 초상

 

오자서가 초 평왕의 시신에 매질하는 모습


그러나 다시 20년이 지난 후 오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합려의 뒤를 이은 부차에게 월나라 구천을 철저하게 짓밟을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역 패권을 확고히 다지자는 것이 오자서의 주장이었는데 부차는 위세를 중원에까지 떨치고 싶은 마음이 바빴고, 그를 위해 월나라를 포용해서 활용하려는 정책이었다. 오자서는 주장을 굽히지 않다가 참혹한 죽음을 맞았고, 몇 해 후 부차가 중원으로 출정한 동안 월왕 구천이 기습으로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부차가 합려의 복수를 위해 장작 위에서 잠을 자고 구천이 부차에게 복수하기 위해 쓸개를 먹었다는 뜻에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이란 말이 널리 쓰였지만, <사기>에는 ‘상담’만 나오고 ‘와신’은 보이지 않는다. 합려가 월나라와 싸울 때 입은 손가락 상처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오자서의 입장을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지어내거나 부풀린 것 같다. 합려가 정말로 구천 때문에 죽은 것이라면 부차가 아무리 불효자라도 적당히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구천을 보좌해 부차를 격파한 두 사람, 범려(范蠡)와 문종(文種)의 훗날 행적도 흥미롭다. 초나라 출신의 친구 사이로 경륜을 펼치기 위해 함께 월나라로 넘어가 구천을 모신 사람들이었다. 구천이 패업을 이룬 후 범려는 그를 떠나 제2의 인생을 꾸린 것으로 전해진다. 송(宋)나라 도(陶) 땅에 가서 주공(朱公)이란 이름을 쓰며 장사로 엄청난 재물을 모았다고 하여 ‘도 주공’은 재신(財神)의 대명사가 되었다. 범려가 떠나면서 문종에게 “구천은 어려움을 함께 겪을 사람이지 편안함을 함께 누릴 사람이 아니”라며 함께 떠날 것을 권했지만 문종은 남아 있다가 얼마 후 오자서와 비슷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범려 초상
문종 초상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