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원전 771년 주나라가 오랑캐의 공격을 피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 부근에 있던 왕도를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부근으로 옮기면서 동주(東周)시대가 시작되었고, 동주시대의 전반부를 춘추시대, 후반부를 전국시대라 부른다. 


동쪽으로 옮겨오면서 주나라 천자의 천하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중원 바깥에서 덩치를 키운 강대국들의 세력경쟁이 중원 내부에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강대국들은 굳이 팽창의 야욕이 없는 방면에서도 다른 강대국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 정책을 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계절존망’ 원리의 필요가 더욱 절실했던 것이다.


춘추시대를 통해 ‘존왕양이’, ‘계절존망’의 원리가 철저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그 원리를 존중하는 태도는 대체로 지켜졌다는 점에서 약육강식의 풍조가 휩쓴 전국시대와 구별된다. 천하질서의 전면적 붕괴를 막을 필요 위에서 강대국 간의 세력균형이 유지된 기간이었다.


천하의 질서가 천자의 권위로 지켜지는 것을 ‘왕도(王道)’라 할 때 강대국의 세력균형으로 최소한의 평화를 유지하는 상태를 ‘패도(覇道)’라 할 수 있다. 후세에는 ‘패도’가 벌거벗은 힘을 가리키는 뜻으로 많이 쓰이게 되지만, 원래 패도는 왕도만은 못해도 그에 버금가는 괜찮은 원리를 뜻했다. ‘패(覇’) 자가 ‘백(伯)’에서 나온 것으로 흔히 해석한다. ‘백’은 천자를 보좌해서 한 방면의 질서를 주도하는 우두머리 제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패도는 권력보다 권위와 신뢰에 의지하는 질서의 원리였다. <사기> ‘자객(刺客)열전’에 노(魯)나라 장군 조말(曹沫)이 회담장에서 제 환공(齊 桓公)을 비수로 협박해 노나라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에 서명하게 한 일이 적혀 있다. 환공은 나중에 이 조약을 원천무효로 파기할 마음이었는데 관중(管仲)이 말렸다고 한다. 강요당한 약속까지도 존중하는 자세로 천하인의 믿음을 얻는 것이 목전의 득실보다 더 크다는 이유였고, 환공이 이 건의에 따름으로써 큰 패업(霸業)을 이뤘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의 패도를 대표하는 제후 5인을 꼽아 춘추5패라 부른다. 그런데 문헌에 따라 5패의 명단에 차이가 있다.


<사기색은(史记索隐)>에 들어 있는 제 환공, 진 문공(晋 文公), 진 목공(秦 穆公), 초 장왕(楚 莊王), 송 양공(宋 襄公)의 명단이 제일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다른 문헌에는 이들 중 한두 명이 빠지고 오왕 합려(吴王 闔閭), 월왕 구천(越王 勾践), 정 장공(鄭 莊公) 등의 이름이 들어가는 명단이 있다. 진(秦)나라와 초나라는 춘추시대 들어 비로소 존재가 나타난 나라였고, 더욱이 오나라와 월나라는 춘추시대 말기에 와서야 일어난 신흥국이었으므로 이 나라 임금들을 춘추5패로 꼽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의 천하 질서에 미치는 힘이 워낙 큰 세력들이었기 때문에 5패에 이름을 올린 것이었다.


서주시대까지 오랑캐 취급을 받던 진(秦), 초, 오, 월 등 신흥국들이 경쟁의 압력이 적은 주변부에서 실력을 키워 강대국으로 성장했고, 그 성장의 주된 수단은 전쟁이었다. 춘추시대를 통해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초기의 전쟁은 운동경기처럼 한 차례 접전의 결과에 따라 진 쪽이 적당히 양보하는 맹약을 맺고 끝내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그런데 춘추 말기에는 상대방을 끝장내자는 전면적 지구전이 유행하게 되었다. 지난 회에 소개한, 송 양공의 몰락을 가져온 기원전 638년의 전쟁도 그런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병법의 대명사로 통하는 손무(孫武)와 오기(吳起)가 중원의 오래된 나라 출신이면서 오나라와 초나라에서 활동한 것도 눈여겨 볼만한 사실이다. 새로운 전쟁 방식이 변방의 신흥국가에서 더 쉽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손무와 오기의 초상


<사기> ‘손자오기(孫子吳起)열전’에는 제(齊)나라 출신의 손무가 오왕 합려에게 등용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궁중의 여인으로 병법을 시연하다가 합려의 애첩 둘이 군령을 제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목을 쳤다는 이야기다. “애첩”이라 해서 여색을 아끼는 합려의 마음을 떠올리기 쉬운데, 그 뜻만이 아니었을 것 같다. 군주의 처첩은 나라 안팎의 중요한 동맹 관계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손무의 책략에는 임금의 군령(軍令)을 절대화하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기원전 506년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할 때 보름 동안 다섯 차례의 연이은 전투 끝에 초나라 수도 영(郢)을 함락시켰다고 한다. 그보다 백여 년 전 무식한 공격으로 송 양공을 혼내준 초나라 군대도 그 사이에 중원의 우아한 전쟁 방식에 길이 들어 있었던 것일까? 쉴 틈 주지 않고 달려드는 오나라 군대에게 기가 질렸을 것이다. “우리도 한 때는 빡세게 놀았는데, 이놈들은 진짜 너무한다!” 


같은 열전 뒤쪽에 나오는 오기는 손무보다 약 백년 후 위(衛)나라 출신으로, 초년에 노(魯)나라와 위(魏)나라에서 장군을 지내고 뒤에 초 도왕(悼王)에게 등용되었다. 그가 한 일은 “법령을 정비하여 불필요한 관직을 없애고 왕족의 봉록을 폐지하여 군대를 키웠다”고 적혀있다. 한 마디로 왕권 강화였다. 이런 정책으로 왕족과 대신들의 미움을 받은 오기는 도왕이 죽은 후 그들의 공격을 받았는데, 도왕의 시신 곁으로 피해서 그를 향해 쏜 화살 중에 시신에 맞은 것이 있었다. 숙왕(肅王)으로 즉위한 태자가 이 불경죄를 빌미로 공격에 가담한 자를 모두 처단했으니, 오기는 자기 죽음으로까지 초나라의 중앙집권에 공헌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