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문명의 본질은 농업문명이다. 석기시대까지는 농업의 생산성이 수렵-채집과 차이가 아직 적었다. 농업사회가 다른 사회들을 압도할 조직력을 키울 만큼 잉여생산이 크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생산력이 크게 발전하면서 농업사회의 치밀하고 거대한 조직이 시작되었다. ‘고대국가’의 발생으로 표현되는 이 단계가 중국에서는 하-상 왕조로 기록되었다.


상나라 탕왕(湯王)이 하나라를 정벌할 때 천여 개 나라가 따랐는데,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를 정벌할 때는 백여 개 나라가 따랐다고 한다. 무왕이 탕왕보다 인기가 덜했던 것이 아니다. 그 사이에 ‘나라’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 숫자가 줄어든 것이다. 온 천하의 지지를 받은 것은 탕왕이나 무왕이나 마찬가지였다.

 

주 무왕 때의 백여 개 나라 중 태반이 지금의 허난성 영역에 있었다고 보면 한 나라의 크기는 우리의 일개 면 내지 일개 군 정도가 보통이었을 것이다. 아직 도시국가 단계였다. 나라의 크기는 계속해서 커지고 숫자는 줄어들어서 영토국가 단계로 나아갔다. 춘추시대에 접어들 무렵에는 대부분 지역이 영토국가에 편입되어 있었고, 전국시대에 접어들면 7웅(七雄)을 비롯한 10여 개 영토국가가 중원(中原, 화하의 영역)의 모든 땅을 나눠 가진 상태가 된다.

 

춘추시대 초기의 제후국
전국시대 초기의 제후국


‘중원’의 범위도 넓어졌다. 중국에는 초기 농업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여러 곳 있었다. 그중 넓은 지역으로 황하 중류 유역, 양자강 중하류 유역과 양자강 상류 유역을 꼽을 수 있다. 청동기문명의 발전에 따라 이 세 지역에서 나란히 ‘나라(國)’로 불리게 되는 큰 정치조직이 자라났다. 이 단계에서는 세 지역의 문명수준에 큰 차이가 없었지만 상호 접촉이 많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다른 문화권을 이루고 있었다. 황하문화권과 장강(長江)문화권, 파촉(巴蜀)문화권이었다.

 

기원전 13-11세기 상나라 수도의 유적인 은허(殷墟)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

 

우한(武漢)시 인근의 반룡성(盤龍城) 유적. 기원전 15세기 전후의 유적으로 성내 면적이 75499평방미터로 측정되었다.
반룡성 등 우한시 인근의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청두(成都)시 인근 삼성퇴(三星堆) 유적 일부

 



삼성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황하-장강문화권과 전혀 다른 양식의 유물이 많다.


중국문명 초기의 역사기록이 황하문화권 입장의 서술로 남아있는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 이래 문명권의 통합이 황하문화권의 주도 하에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문명이 ‘황하문명’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고고학 발굴과 연구의 진행에 따라 황하문화권은 초기 중국문명권의 일부일 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왔다.

 

문명권의 통합에서 황하문화권이 주도권을 쥐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철기(鐵器) 보급이 황하 유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여러 해 동안 검토해 왔다. 중국의 철기시대에는 세계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대부분 다른 지역에서는 광석에서 추출한 철괴를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망치로 두들겨 모양을 빚어내는 단조(鍛造)가 오랫동안 주종이었는데, 중국에서는 높은 온도로 녹여 거푸집으로 찍어내는 주조(鑄造)가 일찍부터 발달했다. 단조가 수공업이라면 주조는 공장공업이라 할 만큼 생산성이 높은 방식이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철기의 사용량이 다른 지역보다 많아서 여러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사실을 한(漢)나라에서 철기가 소금과 함께 중요한 전매품목이 되고 외국에 대한 수출금지 품목이 된 데서 알아볼 수 있다. 철기시대 진입의 의미가 특별히 컸다는 점을 생각해서, 춘추전국시대의 변화에도 큰 배경조건으로 작용한 것이 아닐까 추측했던 것이다. 


(유럽 고고학계에서 선사시대의 시기 구분방법으로 확립된 석기-청동기-철기의 3분법을 중국에는 적용시키기 어렵다는 학자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문자기록이 일찍 시작되어 청동기시대 중에 이미 역사시대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는 철기시대가 한참 진행된 뒤에 문자가 나타났다.)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 근년에 춘추전국시대의 유적 발굴이 많이 이뤄졌는데, 철기 유물이 대량으로 나온 것은 전국시대 말기인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유적뿐이다. 철기의 대량생산이 그 시기에 시작된 것으로 보이므로 춘추시대 이전에 황하문화권이 중화문명의 주도권을 쥐는 과정과 연결시킬 수 없다.

 

청동기시대 말기에 급격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일반적 현상이었다. 지중해 동부 지역의 ‘후기 청동기 대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라는 현상이 서양 고대사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기원전 12세기 전반기의 짧은 기간 중에 그리스의 미케네, 바빌론의 카시트,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 이집트 왕조 등 당시의 문명 중심지가 거의 모두 파괴되거나 몰락한 사실에 관심이 모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변화의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못하고 있지만 철기의 출현과 그에 따른 전쟁 양상의 변화에 많은 관심이 쏠려 있다.

 

(미케네는 기원전 16세기 이래 그리스문명의 중심지였는데 기원전 12세기 들어 급속히 퇴락한 것으로 보인다. 카시트 왕조는 기원전 16세기부터 바빌론 지역을 통치하다가 기원전 1153년에 동쪽에서 온 엘람 족에게 정복당했다. 기원전 15세기부터 1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린 히타이트 제국은 기원전 1180년경 붕괴해서 여러 개 도시국가로 쪼개졌다. 이집트 신왕조는 람세스 3세(기원전 1186-1157 재위) 이후 통치력을 상실했다.)

 

장강문화권이 춘추시대를 통해 중화문명권에 합류한 사실은 초(楚)-오(吳)-월(越) 세 나라의 등장에서 알아볼 수 있다. 세 나라 모두 중원의 기존 세력에게 ‘오랑캐’ 취급을 받았지만 강대국의 위용을 뽐냈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의 고사에서 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송나라 양공은 춘추5패(春秋五覇)에 꼽힐 만큼 큰 위세를 떨친 군주였으나 초나라에게 뜻밖의 패전을 당해 몰락했다. 송군이 포진한 앞에서 초군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며 양공의 좌우에서 공격하기 좋은 기회라고 진언했다. 그러나 양공은 거절했다. “상대의 어려움을 이용하는 것은 어질지 못한 일이다.” 초군이 강을 건너와 대오를 정비하고 있을 때 좌우에서 다시 공격을 권했으나 양공은 같은 이유로 거절했다. 그리하여 모든 준비를 갖춘 초군이 공격해 오자 송군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고사는 양공 개인의 지나치게 어진 품성만이 아니라 송-초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보여준다. 중화의 일원을 자부하며 전쟁에도 격식을 차리는 송나라와 “이기는 게 장땡!”이라며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초나라의 차이다. 공자는 “오랑캐에게도 배울 것이 있으면 찾아서 배워야 한다”고 했는데, 전쟁 방식에는 확실히 오랑캐의 가르침이 통했다. 춘추 초기에 비해 춘추 말기의 전쟁은 “너 죽고 나 살기”의 오랑캐 방식으로 옮겨가 있었다.
또 하나 큰 문화권인 장강 상류의 파촉은 기원전 316년에 진(秦)나라에게 정복당했다. 막대한 생산력을 가진 이 지역에서 진나라가 거둔 변법(變法)의 성과가 이후 백년간 진나라의 통일 사업을 뒷받침해 주었다.

 

춘추시대 이전에 장강문화권은 ‘남만’, 파촉문화권은 ‘서융’이었다. 오랑캐의 이름을 가졌지만, 화하와 비슷한 수준의 농업문명과 정치조직을 발전시키고 있던 지역들이었다. <<예기>> <왕제>에 “중원과 이, 만, 융, 적, 모두 자기네 거처와 음식, 의복, 도구, 기물이 있으며 5방 사람들 사이에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고 하여 5방의 서로 다름만을 말하고 우열(優劣)을 논하지 않은 것은 농업문명권이 아직 중원에 모두 포괄되지 않고 있던 이 단계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