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11. 17:09


1990년 여름 교수직을 떠나고 얼마동안 프랑스에서 자료 조사를 하고 돌아온 후 제주도에 자리 잡았다. 몇 가지 이유가 어울려 작용했다.


첫째, 자연을 가까이하며 살고 싶었다. 그 무렵 유럽에 많이 가서 지내보는 동안 한국의 도시생활이 너무 자연에서 격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케임브리지 같은 소도시는 말할 것 없고, 파리 같은 대도시의 환경도 대구나 서울처럼 삭막하지 않았다. 특히 피에르 콜송과 어울려 프랑스 시골 맛을 보면서 자연 속의 생활을 동경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둘째, 제주도의 특수한 위치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몇 해 전부터 동서교섭사로 연구방향을 잡고 있었다. 이질적 문화-문명 사이의 관계와 작용을 살펴보는 공부다. 그런데 제주도는 본토와 떨어져 있는 조건 위에서 어느 정도 이질성을 가진 곳이다. 제주도와 본토 사이의 관계를 생활 속에서 겪어보는 것이 교섭사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필드워크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셋째, 제주도는 어머니가 터를 닦아놓은 곳이어서 끼어들기 쉬웠다. 어머니는 방언 조사를 위해 1960년경부터 제주도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그곳에 애착을 갖게 되어 퇴직 후 그곳에 은거할 마음까지 품게 되었다. 실제로 1986년 퇴직 후 제주도에서 많이 지내고 계셨는데, 그 후 차츰 수도생활로 기울어져 제주도를 떠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교수직으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학위논문 준비에 전념하기 위해 교수직을 떠난 것이었는데, 다들 교수직을 지키면서 준비하는 학위논문을 갖고 내가 유난을 떤 것은 새로운 분야에 새로운 자세로 임한다는 특별한 사정 때문이었다. 석사과정 이래 십여 년간 공부해 온 방향과 자세를 1985년 이후 영국과 프랑스에 다니면서 바꾸게 된 것이었다.


내 나이 40대 10년을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제일 큰 소득은 글쓰기에 입문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앙일보에 적을 둔 덕분에 공적 글쓰기 기회를 가졌고, 또 한편으로는 외딴 곳에 지내면서 전자통신을 통한 사적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공식 활동 없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당시 유행이 시작되고 있던 전자통신에 끌리게 되었다. 아직 국제인터넷은 들어오지 않았고 하이텔과 천리안이 있었다. 나는 하이텔에 가입해서 두 개 방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중앙광장 성격의 ‘아고라’였고 또 하나는 바둑동호회인 ‘바둑동’이었다.


지금 인터넷에 비하면 이용자가 아주 적어서 하이텔 이용자 전원이 아무나 하고 싶은 말 올려놓는 아고라도 볼 만한 내용 다 살펴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때였다. 몇 주일 드나들다 보니 괜찮은 글 올리는 사람들이 파악되어 그중 몇몇 사람에게 제안해서 보다 심도 있는 토론을 위한 토론방을 하나 만들기도 했다.
그 토론방 이름을 무슨 논단이라 했던가, 지금 기억나지 않고 함께 하던 이들 그 후에 마주친 일도 별로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기탄없이 나눴기 때문에 한 분 한 분의 성품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느껴진다. 한 가지 특별히 재미있던 일의 기억만 남겨둔다.


회원 중의 고광순님이 어느 날 도움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법률동호회인 ‘법촌’이란 동네 게시판에 의견을 올렸다가 무지막지한 몰매를 맞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가보니 보수적인 분위기의 동네에 이 아줌마가(당시 고광순님은 하이텔에서 “안기부아줌마”란 닉네임을 쓰고 있었다.) 들어가 입바른 말씀으로 뒤집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공정한 제3자인 체하며 아줌마에 대한 공격 중 맹목적이고 극렬한 부분을 반박했고, 그게 먹혀들어 분위기가 좀 진정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곳의 극렬분자 하나가 뒷조사를 열심히 했다. 우리 토론방의 존재를 밝혀 아줌마와 내가 “한패”임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내 이력까지 걸고 넘어졌다. 교수자리 하나도 꾸준히 지키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조직 활동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사람은 그 말을 욕이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아직 자유주의를 숭상하는 마음을 갖고 있던 내게는 아주 재미있는 표현으로 들렸다. 그래서 반박하는 글에서 당신은 “조직 활동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이텔 활동 중 토론 쪽보다는 바둑 쪽이 오래갔다. 전자통신 바둑동호회에서 행세하고 존중받는 기준은 두 가지다. 바둑 실력과 글쓰기 실력. 나는 가입 직후 내가 “15단”이라고 뻥을 쳤다. 한국기원 5단, 일본기원 5단, 프랑스바둑협회 5단을 습득(拾得)한 경위를 여러 회에 걸쳐 밝히는 동안 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어떤 평범한 사람도 일생을 통해 한 차례 사람들의 많은 주목을 끄는 ‘15분’의 시간을 가진다는 말이 있는데, 그때가 나의 ‘15분’이 아니었을지.


논단에서의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글과 달리 바둑동 게시판에는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글을 많이 올렸다. 성읍리 외딴집의 생활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과 느낌을 수시로 적어 올리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하도 많다 보니 그 해 바둑동 여름캠프를 우리 집에 차리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막상 와서는 열악한 환경에 다들 아연해 하는 중에 한 친구의 탄식. “김 선생님 언어의 마술에 우리가 속았어요. 이런 흉악한 환경을 그토록 아름답게 그리다니!”


그런 참혹한 실망을 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텔 바둑동에서 내 인기는 식지 않았다. 묵묵히 바둑만 두고 나가던 손님들이 입을 떼기 시작하고, 갈수록 재미가 늘어나는 수다판에 끌려 천리안에서 넘어오는 이들까지 있었다. 그러다 보니 소모임 하나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나는 내가 “조직 활동이라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또 한 차례 절감했다.


청년모임, 여성모임 등 기존 소모임들과 어울리도록 노년모임으로 ‘노털방’을 만들고 40세 이상을 기준으로 했다. 당시 통신활동에서 40대는 하나의 소외계층으로서 ‘노털’이었다. 그런데 바둑동은 달랐다. 나이 있는 회원들의 바둑 수준이 대체로 높았기 때문에 노털방에서 놀지 못하는 회원들이 거꾸로 소외감을 느꼈다. 노털방 내부의 행복 증가가 그 외부의 불행 증가로 바로 이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이텔 바둑동’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자원(바둑 능력과 이야기 능력)이 한 구석에 편중될 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입장이 어떻게 엇갈리는지 모처럼의 직접 경험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과 개별적으로 어울려 노는 것은 괜찮은데, ‘조직’으로 묶이니까 불편하고 괴로워지는 것이었다.


결국 하이텔을 떠나 따로 모임을 만들게 되었을 때 나는 ‘동네바둑’이란 간판을 제안했다. 회원 대부분이 1급이고 그중에는 세미프로까지 몇 명 있었으니 통상적 의미의 ‘동네바둑’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지만, 기량보다 분위기를 중시한 제안이었다. 이 이름이 채택되어 십년가량 떠들썩하게 어울려 놀다가 차츰 모임이 작아지고 뜸해져 정기 리그전까지 그만둔 지 몇 해 되었지만 회원들 사이의 친구관계는 많이 남아있다. 가까이 사는 회원들끼리는 종종 보며 지내는 것이 보통이다.


10년 가까이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주로 어울린 것은 신문기자들과 민예총 회원들이었다. 그곳 학계 사람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었다. 한국 대학의 ‘기득권층’ 분위기를 내가 유별나게 싫어한 데는 “못 먹는 포도는 시다”는 심리도 작용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나 자신이 교수직 그만둔 까닭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쁜 쪽으로만 생각이 쏠렸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관점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한국에서 교수직 있으면서 학자 노릇 제대로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그들이 학자의 자세를 지킨 것은 대학 환경 덕분이 아니라 대학 환경에 불구하고 본인의 소질과 노력이 특출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아무튼 제주에서는 즐겁게 이야기 나눌 교수들을 두어 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기자 중에는 재미있는 사람이 많았다. 추상적 학문이 아니라 지역 현실을 다루는 그들이 지역에 대한 내 관심에 맞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제주에서 진보적 신문을 표방하던 제민일보에서 주례 고정칼럼을 만들어주었는데, 원고료는 서울에서 받던 데 비해 “껌값” 수준이었지만 나는 “주민세” 내는 자세로 집필에 임했다. 기자들과 함께 밥을 먹으면 기고가 고맙다며 그들이 밥값을 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 친구도 있었다. “지방신문 기자라는 게 밥 얻어먹는 직업인데 김 선생 덕분에 밥 사드리는 역할을 모처럼 맡아봅니다.”

 

민예총 친구들도 제주도의 특성에 관한 이야기의 좋은 상대였다. 그중에서도 문무병, 강요배 두 선생에게 배운 것이 많다.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의 긴장관계에 대해 관심이 크고 감각이 뛰어난 분들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4-3 탄압 이래의 억압적 지방정책으로 인해 그 특수성이 혜택보다 질곡으로 작용하던 시대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할 때였다. 그 상황과 전망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는 이들이 민예총에 많았다.


제주민예총은 지역 진보진영의 중심적 역할을 맡고 있었고 4-3 기념행사에도 중심이 되었다. 나는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간부들이 의논하는 자리에 함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느 해였던가, 4-3 행사계획을 토론하는 자리에서 문 선생이 새로운 의견을 내놓았다. 4-3 행사에서 늘 ‘반미’를 내세우며 ‘반일’을 소홀히 해왔는데, 이제부터 좀 균형을 잡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자리에서 대개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의견에 대해서는 바로 반론을 내놓았다. 제주도는 조선 왕조시대에 지속적인 억압과 차별의 대상이었다가 일본 지배 덕분에 발전의 기회를 얻은 측면이 크다. 조선시대를 통해 성균관에 한 명도 들어가지 못한 제주인이 일제시대에는 조선과 일본의 최고학부에 많이 진학하지 않았는가? 공물로 수탈만 당하던 제주 특산품이 넓은 시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뉴라이트에서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조선 전체에는 틀린 것이지만 제주도에 한해 국지적으로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그런데 ‘균형’을 위해 ‘반일’을 들고 나간다면 ‘반대를 위한 반대’의 느낌을 주기 쉽다는 점에서 반대한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문 선생이 좋은 시각을 얻었다며 치하하고 자기 의견을 철회했다.


제주를 떠난 뒤 쓴 첫 책 제목이 “밖에서 본 한국사”였는데,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밖에서’ 보는 관점을 중시하게 된 결과다. 밖에서 보는 시각을 취하면 시야가 넓어지고 밝아진다. 제주에 애정을 가진 외지인으로 여러 해 지내면서 제주의 장래에 관한 생각 정리한 것을 제주 떠나기 전에 <한라일보>에 몇 차례 실은 일이 있다. 그중 제주도의 자치 수준을 특별히 강화할 필요에 대한 의견은 그 사이에 꽤 실현되었다. 그러나 환경 관리 수준을 높일 필요에 대한 의견은 별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주장하고 싶은 의견 하나를 아래 붙인다.

"330대의 미니버스"

LA에서는 자동차 없이 꼼짝도 할 수 없다. 전철도 지하철도 없고, 대부분의 버스는 구역 내에서만 운행하기 때문에 승용차가 아니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다. 여행자라도 차를 빌리지 않으면 관광버스가 데려다주는 곳밖에 다닐 수 없다.


지금은 1천만을 헤아리는 LA의 인구가 아직 1백만이 안 되던 1930년대까지 이 도시는 미국에서 가장 전차 노선이 잘 깔려있는 도시의 하나였다. 그런데 1938년에 자동차회사 GM이 스탠다드 석유회사, 파이어스톤 타이어회사와 힘을 합쳐 전차회사를 매입했다. 그리고 전차를 없애버렸다.


2차대전 후 팽창하는 LA의 도시계획은 자동차 위주로 설계됐다. 시내의 어느 지점도 고속도로에서 6km 이상 떨어진 곳이 없다. 그러나 세계제일의 도로망도 7백만 대의 차량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LA시민들의 냉소적인 자랑거리 두 가지는 '세계최대의 주차장'과 '원조 스모그'다.


필자가 처음 제주에 와본 것이 1980년이다. 통계를 찾아보니 그때 제주도의 등록차량은 6천 대 미만이었는데 최근의 통계(1996년)는 12만여 대로 20배 이상 늘었다. 그 주범은 승용차, 특히 자가용 승용차다. 화물차는 이 기간 중 10배 는 반면 자가용 승용차는 물경 70배로 늘어 전체 차량 대수의 56%를 점하고 있다. 화물차의 증가를 생산활동의 성장에 대략 비례하는 것으로 본다면 소비 성향이 강한 자가용 승용차는 그보다 7배의 속도로 증가해 온 것이다.


거품시대의 대명사 자가용은 불황기를 맞아 수많은 제주의 가구에 힘겨운 부담이 되고 있다. 그러나 쉽게 차을 없앨 수도 없는 것은 그 편리함에 길이 든 까닭도 있지만 공공운송 체계가 미흡한 때문이다. 이 거품을 시원스레 걷어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결단에 앞서 정책의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보통사람들이 자가용 없이도 불편하지 않게 다니려면 얼마나 큰 공공운송 체계가 필요할 것인가? 제주에서 가장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도 하루 20회 이상 버스가 닿고 가장 한적한 군도(郡道)라도 50회 이상 버스가 지나다닐 정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지금 운행 중인 시외버스 330대의 갑절이면 충분하리라 한다. 그리고 추가로 필요한 버스는 중소형이면 된다. 330대의 미니버스를 투입해 수만 명의 자가용 차주들로 하여금 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고 앞으로도 자가용의 추가 수요를 막을 수 있다면 제주의 경제를 위해, 그리고 제주의 환경을 위해 엄청난 이득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갑절의 버스를 운행하면서 수지를 맞춘다는 것은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공공운송은 공영사업이 되어야 할 것이며, 지금보다도 운임을 낮춰 적자 폭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마 연간 100억원대의 적자가 날 것이다. 그러면 이 적자를 보전할 재원은 어디서 구할 것인가.


자가용 승용차의 차량세를 대폭 올리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한다. 물론 새로 등록하는 차량은 곧바로 크게 올리되 기존 차량은 시간을 두고 점진적으로 올리는 것이다. 상당수의 차주는 앞으로 자가용의 보유를 포기하겠지만, 역시 상당수의 차주는 보유를 계속한다고 볼 때 머지않아 차량세 수입 증가가 1백억원대에 이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 세계라 하더라도 교통만은 시장논리에 방임할 수 없다는 것이 LA의 교훈이다. 제주의 환경은 제주인의 쾌적한 생활을 위한 조건일 뿐 아니라 미래를 위한 소중한 자원이기도 하다. 330대의 미니버스로 몇 만 대 승용차를 대신할 수 있다면 이 불황기에서 얻는 최대의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