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세에 교수직을 떠난 이유

내 여권에는 이름이 “Orun Kihyup Kim”으로 되어 있다. 1983년 첫 여권 발급을 신청할 때 정한 이름이다.


두 형이 1970년대 초반에 미국으로 유학 갔는데, 원래 이름의 발음을 알파벳으로 적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만들었다. 그런데 ‘Ki Bong Kim’과 ‘Ki Mok Kim’이 같은 시기에 버클리에서 지내는 동안 이름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퍼스트네임과 라스트네임이 모두 같으니 두 사람을 함께 아는 미국 친구들에게 설명이 따로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10년 후 내 여권을 신청하면서 ‘Ki Hyup Kim’ 이름으로 발급받고 싶지 않았다. 조상이 지어준 이름을 버릴 수는 없으니 미들네임으로 챙겨두고, 마음에 드는 퍼스트네임을 하나 만들어 쓰기로 했다. 토머스니 리처드니 버터냄새 나는 이름 쓸 생각은 전혀 없고, 좋은 우리말 중에서 고르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어른”을 짚었다. 내 성격에 치기(稚氣)가 많은 편인지라 진중한 성품을 키우려는 뜻에서 고른다고 고른 것인데, 나를 부르는 외국인들에게 “어른, 어른” 소리 듣기 바라는 뜻이 겹쳐져 있었으니 이 또한 치기를 벗어나지 못한 선택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상상하기도 어렵겠지만 당시까지 대한민국 여권이란 것이 대부분 ‘단수’ 여권이었다. 특수한 신분의 극소수 사람들 외에는 한 번 출국할 때마다 여권을 새로 발급받아야 했다. 두 번째 여권을 신청했을 때 문제가 생겼다. 원래 이름을 정확히 음사한 이름으로만 발급해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여권을 발급해 준 것은 실수였다고 했다. 그래서 “Orun Kim” 이름으로 받은 외국 학자들의 편지를 한 무더기 가져가 보여주고 ‘윗선’의 승인을 받은 뒤에야 겨우 발급을 받았다.


그 일로 대구시청에 오락가락하는 중에 다른 곳에서 이름 문제가 또 불거졌다.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의 니덤연구소(동아시아과학기술사연구소) 방문을 계획하면서 조지프 니덤(1900-1995)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고령인 니덤 교수의 편지는 보통 비서가 구술 받아 타자 쳐 보내주는데, 손수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편지가 한 장 왔다. 내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는데...


편지 끝의 질문 하나를 보고 손수 작성한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앞서 내가 보낸 편지의 자기소개에 “金基協”이라고 한자 이름도 적어 보냈는데, 니덤 교수 말씀인즉 “金”과 “Kim”, “基協”과 “Kihyup”은 서로 대응이 되는데 “Orun”은 한자로 대응되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무엇이냐, 무슨 종교나 신분을 나타내는 타이틀이냐, 묻는 것이었다.


답장을 쓰면서 약간의 고심 끝에 솔직히 깨놓기로 했다. “어른”이란 말의 “mature person(성숙한 사람)”이라는 뜻이 좋아서 이름으로 쓰는 것인데, 사실은 그 말이 한국에서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At the time I had no idea that I would be asking a senior person like you to call me ‘Orun’. Many apologies.(선생님처럼 연만한 분께 그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하게 될 줄 그때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50세 연상의 대학자에게 나를 “어른”이라고 불러 달라니, 이런 망발이 있나!

 

두 달 후 케임브리지에 도착해 짐을 풀어놓고 연구소로 찾아가니 일반주택 같은 3층 건물이었다. 벨을 누르자 내 또래로 보이는 사람이 (그레고리 블루 박사였다.) 문을 열어주고 내 얼굴을 보자 대뜸 “Oh, you are Professor Orun, aren’t you?(아, 어른 교수시군요.)”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니덤 교수가 내 편지를 커피브레이크 때 들고 와서 연구소 식구들에게 두루 보여주며 한 차례 함께 웃은 일이 있어서, 내 라스트네임은 몰라도 퍼스트네임은 다들 기억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름에 대해 미안해하는 내 모습이 연구소 사람들에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동양학 연구소이므로 동양(한-중-일) 학자들과 늘 교류-접촉이 있는데, 동양 학자들의 엄숙하고 진지한 일반적 태도에 서양인들은 다소 불편함을 느낀다. 그런 차에 내 별난 편지를 보며 “이건 좀 재미있는 별종인가?” 기대감이 들었는지 편하게 나를 대했고,(기꺼이 내게 “어른”이라 불러주고) 서양에 처음 체류하러 간 내게는 적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반년간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공부하는 방향과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 우리 또래 한국의 중국사 연구자들은 대개 일본 학풍을 출발점으로 삼았고 나도 그랬다. 윗세대 선생님들의 학풍이 그랬을 뿐 아니라 그 분야의 치밀한 연구가 일본에서 나온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서양 연구서를 많이 본 편이지만 그때까지는 서양의 중국 연구가 적어서, 개관을 위해서는 서양 문헌을 보더라도 구체적 연구에는 일본 문헌의 비중이 압도적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는 조지프 니덤과 또 한 분 중국학의 대가인 자크 제르네(1921-2018)의 연구 성과만이 아니라 그들의 일과 생활 자세를 보면서 유럽 학풍의 매력적인 측면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내가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직후 제르네 교수 책의 영문판()이 케임브리지대 출판부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로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원래 니덤연구소에서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서양 천문학과 수학을 중국에 들여오는 과정을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제르네의 책을 보고 그의 연구 영역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중국과학사에서 동서교섭사 내지 문명사로 넘어간 것이다.


니덤과 제르네, 두 분에게 얻은 가장 큰 가르침은 연구 주제를 대하는 자세였다. 그때까지 나는 “산이 거기에 있기에 오른다”는 자세로 학문에 임하고 있었다. 이제 돌아보면 그것은 “세상이 거기에 있기에 정복한다”는 제국주의와 같은 틀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오만한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두 분은 중국학의 서로 다른 영역을 서로 다른 방법으로 연구해 온 분들이었지만, 각자 나름대로 절실한 인간적 동기를 갖고 연구에 임해 왔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두 분이 제자 같은 동료들을(나를 포함해서) 대하는 태도에서 그 사실이 확실히 드러나는 것으로 느껴졌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몇 차례 파리에 가서 제르네 교수 및 그 제자들과 만나고 세미나에도 참석했다. 안식년을 끝내고 귀국한 후에도 방학마다 유럽에 갔는데, 케임브리지보다 파리에 더 많이 가게 되었다. 제르네의 연구에서 연결되는 방향으로 학위논문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도 파리에서도 같은 또래 연구자들과 많이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이 큰 행운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1970년대 초 중국의 국제사회 복귀를 계기로 서양에서 중국 연구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에 그때 대학에 다니던 우리 또래에서 새 세대 연구진이 형성된 것이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공부하는 자세에 관해 깨우친 바가 컸다.

 

당시 프랑스의 젊은 연구자들 중에는 CNRS(국립과학연구센터)에 적을 둔 사람이 많았다. 다른 부문은 모르겠으나 인문학 분야에서는 CNRS를 ‘고등실업자 구제센터’라고 불렀다. 전국 교수 숫자의 3분의 1가량의 많은 연구원이 적을 두고 있는데, 처우가 형편없다. 봉급은 최저임금 수준에다 개인연구실도 없다. 윗세대 연구자들은 식민지의 대학에서 활동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식민지가 없어진 이제 CNRS가 식민지 대학 노릇을 이어받았다고도 했다.


어느 날 몇 사람이 한담을 나누다가 한 친구에게서 신세 한탄이 나왔다. 고등교육을 받은 우수한 연구자들의 소득수준이 환경미화원보다 못하다는 현실이 한심하다고. 이에 한 친구의 대꾸가 절창이었다. “환경미화원보다 우리 중에 자기 하는 일 좋아서 하는 사람이 더 많을 거야.” 부수되는 이득과 혜택에서 동기를 찾는 일반 직업과 달리 학문은 본인이 좋아서 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열정페이’를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우스개에서 나는 충격과 공감을 함께 느꼈다. 내가 길들여져 있던 엘리티즘에는 충격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께 재능이란 ‘공공재’라고 배웠다. “하늘이 네게 남들보다 공부 잘하는 재주를 주었다면 그것이 너 한 몸을 위한 뜻이겠느냐? 그 재주 덜 가진 사람들을 위해 쓸 수 있어야 재주의 가치가 살아나는 것이다.” 이런 말씀에서 뿌듯한 사명감을 느끼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런 사명감을 가진 특별한 사람은 그만큼 누리는 것도 당연히 더 많아야 한다는 이기적인 믿음이 따라붙었다. 그런데 유럽 친구들에게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것이 입에 발린 구호가 아니라 일상의 감각이었다.


한편 공감을 느낀 것은 학문의 자발성을 받드는 ‘인문’ 정신이었다. 국어학자인 어머니 아래 자라면서 받은 영향 때문인지 내 기질 때문인지 나는 초년부터 공부의 양보다 질을 중시하고, 따라서 주관적 가치에 집착하는 태도를 갖고 있었다. 물리학을 포기하고 전과한 것도 역사학 쪽은 “혼자 놀 수 있을” 것 같아서였고,(물리학에도 내 취향대로 갈 수 있는 길이 있었겠지만, 당시에는 조직활동을 전제로 하는 실험물리학 방면에 너무 쏠려 있었다.) 사학과에 와서도 민두기 교수(1932-2000)와 불화를 일으키고 서울대를 떠나게 된 것 역시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민 교수 돌아가실 때 나이가 된 이제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그분과의 악연에 관해서도 허물없이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적게 될 것이다.)


내 인생 경력 중 주변사람들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한 대목이 1990년 40세 나이에 교수직에서 물러난 것이다. 나 자신 그리 명쾌하지 않은 대목이다. 앞서 말했듯이 그 무렵 아버지 일기에 접하며 느낀 자격지심도 하나의 요인이었고, 유럽 학자들과 어울리며 학문의 자세를 새로 돌아보게 된 것도 하나의 요인이었다. 그리고 ‘87년 체제’가 이 사회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학원 민주화’의 한계와 문제점을 절감한 것도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이제 와서 당시의 결정을 잘한 것이라고 강변할 마음도 없고 잘못한 것이라고 후회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결정으로 인해 왕성한 활동을 할 연대를 유별난 조건들 속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조건들이 내 공부와 활동에 제약을 가한 측면도 있고, 지켜준 측면도 있고, 키워준 측면도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같은 또래 다른 학인들에 비해 모자라는 면도 있고 남는 면도 있게 되었다. 이제 퇴각로에 접어든 사람으로서 모자라는 면 따라잡는 데 너무 애태울 것 없이, 남는 면 나눠드리는 데 힘을 쏟고자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