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10년 전으로 : 무한경쟁의 시험제도

기사입력 2009-02-27 오전 10:42:24

무한경쟁의 시험제도

중국의 발명품으로 서양의 근대화에 큰 공헌을 한 것들이 있다. 나침반과 화약, 그리고 제지술(製紙術)이다. 이것들 없이는 대항해시대도, 근대 전쟁의 발달도, 정보화시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교섭사가들은 또 하나 중요한 중국 발명품을 지목한다. 과거(科擧) 제도다. 18세기 이래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공무원 임용 시험 제도를 만들어 중앙 집권적 관료체계를 형성한 것 역시 중국에서 배워갔다는 것이다.

과거제는 6세기말 수(隋)나라 때 만들어져 1905년까지 1300여 년간 시행됐다. 유교국가의 관료·집단 내지 지배계층을 유지-관리하는 데 핵심적인 제도였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 즉 10세기 중엽에 도입되어 차츰 시행이 확대된 결과 고려말까지는 국가 구조의 뼈대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학술과 교육의 기본 메커니즘으로 계속 작용했다.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과거제의 폐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폐단은 시험의 부정(不正)이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문제는 너무 많은 지망생이 과거 준비에 매달리는 인력 낭비였다. 정약용의 과거제 개혁안에 이 문제가 비쳐져 보인다.

정약용은 각 고을 수령이 지역 유지들의 의견을 들어 과거 응시자를 선발하도록 하는 제도를 제안했다. 3년을 주기로 전국에서 2880명을 뽑고, 여러 단계의 시험으로 합격자를 줄여나간다는 것이었다. 수만 명의 전국 선비들이 과거에만 매달려 있는 현실을 타파하려는 의지였다.

응시자의 범위는 과거제의 원죄(原罪)와도 같은 문제였다. 양반층에 의지하는 국가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문호를 좁힐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 외에 이따금 증광시(增廣試)를 행하는 정도였지만, 양반층 확대에 따라 알성시(謁聖試), 춘당대시(春塘臺試) 등 요행이 많이 따르는 약식의 별시(別試)가 늘어나 실력 없는 선비들까지 유혹했다.

엄청난 사교육비 문제를 소비자보호원도 지적했다. 그러나 수능시험의 난이도 따위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문제의 본질 같지 않다. 전국 학생의 대다수가 하나의 길에만 몰려있다는 것이 근본 문제다. 아무리 시험을 쉽게 한들 한 점 더 따기 위한 무한경쟁이 식을 리 없다. (1997년 5월 30일)

▲ 학생과 학부모의 일제고사 거부 의사를 존중했다는 이유로 학교를 떠나야 했던 김윤주 교사가 아이들과 헤어지는 장면. 운동부원과 학습지진아 등 일부 학생의 응시 기회를 가로막는 것은 학습권 침해가 아니라고 판정하면서 자발적 거부를 극한 징계하는 교육당국은 이 나라 교육계에서 일체의 양심을 말살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것일까? 그렇게 하면 이 나라 모든 국민을 '이기적 존재'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프레시안

  고대에도 중세에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르치는 종교와 사상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계급과 신분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거의 없었고, 있더라도 영향력이 극히 미미했다. 완전한 평등권을 주장하는 '만민평등' 사상의 확산은 근대적 현상이다.

평등이 자연스러운 상태이며, 그것을 가로막아 온 야만의 질곡을 벗어나 평등을 '되찾는' 것이 문명의 발전이라고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믿었다. 아직도 그 믿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만민평등이 사회 조직의 보편적 원리로 널리 시도되면서 그것이 저절로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쌓여 왔다. 평등을 바람직한 이념으로 받드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자연법'의 뒷받침을 받는다는 믿음은 지키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근대사회에서 평등 이념이 확산된 원인을 유동성의 증가로 설명하기도 한다. 산업화된 근대사회에서는 그 전의 농업 사회에 비해 노동력의 많은 이동이 필요하다. 지역 간 이동만이 아니라 계층 간 이동도 필요하다. 그래서 신분 구속의 철폐가 산업화의 심도에 발맞춰 진행되어 왔다는 것이다.

평등 이념을 제창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사심 없이 다수 민중의 행복만을 염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이념이 일세를 풍미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유동성 증가를 요구하는 산업 구조의 변화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봉건적 질서를 깨뜨리는 데 필요한 수준의 자유와 평등은 쉽게 이뤄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조직이 그렇게 이뤄진 후, 그를 넘어서는 자유와 평등의 발전은 현실 조건의 벽에 부딪쳤다.

평등 이념은 조선 건국에서도 중요한 원리였고, 이 원리를 구현한 것이 과거제였다. 고려의 귀족층보다 훨씬 넓은 범위의 중소 지주층이 양반 계층을 형성하여 국가 운영의 주체가 되었다. 과거 합격을 통해 신분을 획득하는 '계층'으로서 양반이 혈통에 따른 '계급'으로서 귀족을 대치한 것은 평등의 확장이었다. 고려 말기 농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 주체가 대지주로부터 중소지주로 비중을 옮긴 산업 구조의 변화가 그 배경이었다.

과거제는 고려 초기부터 시행되었지만 관직 등용의 통로로서 그 기능은 고려 말기까지 음서(蔭敍)에 뒤지는 것이었고, 체제의 주축이 된 것은 조선 왕조에 들어와서의 일이었다. 조선 초기에 과거제는 지배계층의 재편을 가져왔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연구에(<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따르면 조선조를 통틀어 문과 급제자 1만4333명 중 본관이 밝혀지지 않은 사람이 451명인데, 그중 229명이 국초 100년간의 급제자 1470명 중에 들어 있었다고 한다. 내세울 본관조차 없던 서민이 국초에는 급제자의 15%를 점했다는 것이다. 이 비율이 19세기에는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초기에 생산적 변화를 몰고 온 과거제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로섬게임으로, 그리고 마이너스섬게임으로 전락해 간 것은 무엇보다, 산업 구조의 변화에 발맞추는 개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에 발전한 노동집약적 농법이 중소 지주층의 번영을 가져와 양반 계층 중심의 국가 구조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농법 변화와 산업 다각화 추세로 인해 양반 계층의 사회경제적 근거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도 과거제로 대표되는 국가체제는 이 변화에 충분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자들이 과거제 개혁안을 제기한 것이다. 그 골자는 응시 자격을 단계적으로 통제해 과거 준비에 매달리는 사람 수를 줄이는 것이다. 관직의 문호를 널리 개방한다는 '평등'의 원리를 지키되 그 원리에 따르는 현실적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조선 왕조의 평등에 비해 대한민국의 평등은 훨씬 더 보편적인 원리다. 그리고 이 원리가 적용되는 가장 중요한 분야의 하나가 교육이다. 급속한 산업화에 따라 한국의 교육은 큰 양적 팽창을 이뤘고, 근년의 민주화에 따라 질적으로도 발전해 왔다.

교육의 목적은 복합적인 것이지만, 크게 보아 공급자 측면과 수요자 측면으로 갈라진다. 근대 국민교육 초창기에는 공급자 측면이 중시되었다. 국가가 교육을 시행하는 목적이 효과적인 국민 동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민주 이념과 복지 이념의 발달에 따라 피교육자의 행복 증진을 더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왔다.

교육의 한 요소로서 '시험' 제도가 원래 공급자 측면을 대표하는 경향을 가진 것인데, '일제고사'란 그중에서도 극단적인 형태다. 공급자 측면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지나쳐 수요자 측면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궁리해 낸 것이 표집시험이다. 민주주의가 겨우 자리 잡고 복지의 중요성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이 사회에서 일제고사 부활 시도는 퇴행적이고 반동적인 정권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정책이다.

반동적인 정책이라고 하는 것도 과찬이다. 반동적 효과도 가져오지 못할 멍텅구리 정책이다. 피교육자의 행복 증진 기회를 빼앗더라도 체제 운용에 도움이 된다면 반동적 정책이라는 평가나마 가능하겠지만, 사회적 비용만 증폭시킬 뿐, 현실적 효과를 바라볼 것이 없다. 교육을 시장판으로 만들어 장사꾼들 벌이를 키워주는 것이 어떻게 국가 사회의 교육 기능 훼손에 대한 보상이 될 수 있겠는가?

정책 추진 방법부터 멍텅구리 정책답다.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시험 거부 기회를 줬다는 이유로 파면, 해임의 칼을 휘두르면서 운동부원 등 평균점수 떨어뜨릴 학생들에게서 시험 칠 기회를 박탈하는 행태는 용인한다. 그리고 시험 결과 조작이 드러난 관계자들에게도 직위해제라는 솜방망이다. 행정 운용의 ABC조차 모르는 당국자들 상대로 교육의 이념까지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겠다.

10년 전 위의 글을 쓸 때나 지금이나 과도한 사교육비는 우리 사회의 큰 짐이다. 과도한 경쟁 원리가 불필요한 비용의 유발을 넘어 실질적 평등을 해치는 지경에 이른 현상이다. 한국 교육정책은 지난 수십 년간 실효성에 한계가 있을지언정 이 문제의 완화를 지향해 왔다. 그런데 이제 난 데 없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현 정권이 달려 나가니, 담당자들이 갈팡질팡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