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쾌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기 싫어지는 것도 노쇠현상의 하나일까? 지난 봄 김포공항에서 공항공사 직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를 겪을 때는 어떻게든 지적해 둘 일이라 생각했지만 그 뒤에 생각나도 꼭 적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초보 의원이 마침 김포공항에서 취한 행동이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보며 적어둘 생각이 난다.

 

북경에 워크숍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는데, 항공권을 주최측에서 예약해 주었다. 그런데 짐을 체크인하고 출국수속을 다 밟은 뒤 탑승장 입구에서 공항공사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예약된 이름이 내 여권 이름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여권 이름은 "Orun Kihyup Kim"이다. 35세 때 처음 여권을 발급받으면서 정한 이름이다. 한국인이 외국 나가서 쓰는 이름이 대개 한국 이름을 알파벳으로 음사하거나 서양 이름 하나를 취해서 성과 함께 쓰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 두 가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지식하게 음사하는 이름은 외국인이 불러주기에 불편하다. 게다가 형 둘이 일찍 유학 나가면서 이름을 음사해서 쓰다 보니 돌림자인 "Ki"를 똑같이 퍼스트네임으로 쓰게 된 것을 본 터다. 그리고 서양 이름 취하는 것은 내 문화적 취향에 안 맞는다.

 

그래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퍼스트네임을 "어른"이라 하면 외국인이 부르기에도 편하고 듣는 기분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원래 이름을 아주 버리기 미안해서 미들네임으로 집어넣어 뒀지만 세계 어디를 가서도 쓸 일은 없었다.

 

그런데 주최측에서 "Orun Kim"이란 이름으로 예약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오늘 꼭 가야 하는데, 그러면 이 항공권은 반납하고 새로 끊어야 하는 겁니까?" 그랬더니 아래층에 있는 중국 항공사 부스에 가서 "Orun Kim"이 곧 "Orun Kihyup Kim"이라는 확인을 받아오면 통과시켜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워낙 양순한 성격이라서 웬만한 일은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애국심 너무 강한 게 문제다. "Orun Kim"이 "Orun Kihyup Kim"이라는 사실을 한국 기관인 공항공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데 중국 항공사에서는 확인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이치인가? 항공사 부스의 직원이 본사에 연락해서 예약한 사람을 찾아 확인하는 것도 아닐 테고, 그야말로 승객과 항공사에 대한 공항공사의, 아니, 공항공사 직원의 "갑질" 아닌가? 있지도 않은 문제의 책임을 공항공사가 외국 항공사에 전가한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마침 탑승까지 두어 시간 여유도 있어서 상징적인 항의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예약자가 나라는 사실을 항공사에서 더 잘 확인할 길도 없을 것이므로 공항공사에서 확인해 통과시켜 주기 바라니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방침을 정해주기 기다리겠다, 이르고는 시위에 들어갔다. 힘든 시위도 아니었다. 저쪽 의자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두 시간의 시위가 아무 효과도 일으키지 못했다. 항공사 부스에 가니 여권을 확인하고 바로 확인서를 써 주기에 그것을 갖고 탑승장에 들어가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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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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