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선 열차를 장성서 내려서 동으로 담양을 향해 가면 그 중간쯤하여 한재라는 곳이 있다. 이름만 듣고 가보지 아니한 이는 두메산골처럼 여길른지 모르나 실지론 영산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극락강 유역의 기름진 벌에 위치하여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이 한재서부터 남으로 진원을 거쳐 임곡으로 가는 한길이 트였고 그 길가에 '제하상비'(祭鰕商碑)라는 초라한 비석이 한 개 오두마니 서있다. 내가 한재를 떠난 지도 이미 십여 년이므로 자세한 기억은 없으나 아마 마을을 막 벗어날 어름의 한길 동편에 이 비가 서 있지 않았던가 싶다.

 

십년이 지난 오늘날 전라도의 문화기관에 글을 부치려 하매 문득 이 조그만 비석이 생각남은 그 비문에서 읽을 수 있는 사실이 그 당시 몹시도 내 마음을 감격케 하였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여늬 비석에서 보는바, 한 인간의 허영심을 만족시키려는 그러한 속된 것이 아니고 溫情과 信義로 얽혀진 인간성의 아름다운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내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면 그 비문의 사연은 - 어떤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여인이 어린 아들 하나를 데리고 지방의 饒戶인 지씨 댁에 깃들이면서 새우젓 장사로 생계를 삼았었다. 그는 말 못할 무슨 사정이 있었음인지 그의 근지를 밝히는 일이 없었고 말없이 새우젓 동이를 이고 마을에서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곡식이랑 솜이랑과 바꾸어 와서 그로써 어린 아들을 길러나갔다. 그러던 것이 한 번은 여늬 때와 같이 어린 아들의 손목을 이끌고 새우젓 동이를 이고 장사길을 떠나간 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씨 댁에선 궁금하고도 가엾어서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종적이 묘연할 뿐, 그가 맡기고 간 얼마만큼의 솜과 곡식을 息利를 놓아 길러서 그 임자가 찾아올 날을 기다리었으나 해가 거듭해도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마침내 지씨는 그 동안 길리운 재물로 땅을 사서 마을에 맡기고 그 소출로 이 가엾은 새우젓 장사 모자의 제사를 받들도록 부탁하였다. 마을사람들은 그러한 지씨의 처사를 아름다이 여기고 또 이 애틋한 새우젓 장사의 사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나는 이 비석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성에 대한 그윽한 희망을 느낀다. 이렇듯 순된 마음씨를 가진 백성들이 어쩌면 동족상잔의 악착한 역사를 빚어낼 수 있을 것인가 하고도 생각키운다. 역시 지금 우리들이 처해 있는 현실은 악몽의 한 토막이고 겨레의 앞길엔 밝고도 따뜻한 새 날이 올 것을 믿어마지 않는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