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최유진 양과 이병한 군의 결혼식에 갔다. 아내는 신부 집에, 나는 신랑 집에 봉투를 넣기로 했는데 아내가 자기 봉투도 써 달라고 해서 "평화제작소 건립을 축하합니다. 리미옥"이라 써주고 내 봉투에는 "행복제작소 건립을 축하합니다. 김기협"이라고 썼다. 각자 자기 봉투를 들고 가기로 했는데 내 봉투는 깜빡 놓고 나온 것을 지하철 안에서 깨달았다. 그래서 아내 봉투만 내게 되었다.

 

이제 검색해 보니 최병모 선생에게 메일로 이병한 선생 얘기 꺼낸 것이 작년 4월 17일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다음 이렇게 메일을 맺었다.

 

내가 유진이 보고 그 친구 생각이 난 건, 몸 아끼는 자세를 공유하는 것 같아섭니다. 그 친구는 공부를 머리로만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한다는 입장이 분명하죠. 그래서 몸 관리에 투철하고, 그 주축이 요가더군요. 서로 편안하게 끌리고 어울릴 만한 품성일 것 같아서 권할 생각이 났고, 그 친구가 내년 초 귀국하면 생활의 틀이 크게 바뀔 것이므로 (장가 가라는 압력도 생기고) 그 전에 검토하는 게 좋은 타이밍일 것 같아서 불쑥 얘기를 꺼냈습니다. 추석 전후해서 잠시 귀국할 예정이고요.

 

최 선생이 마당에 꽃이 좋으니 한 잔 하러 오라 청해서 그 전날 아내랑 함께 갔었다. 그런데 꽃보다 딸아이에게 더 마음이 끌렸다. 어렸을 때 (20여 년 전 피차 제주에 살 때) 본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몇 해 전 자기가 참여하는 독서클럽에 연사로 불러주어 한두 차례 보면서 참 씩씩한 젊은이구나, 하는 정도 좋은 인상을 (내 글 열심히 읽어주는 데 고마운 마음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우리 내외를 응대하는 태도를 보니 그냥 괜찮은 사람 정도가 아니라 대단히 훌륭한 사람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 알아볼 수 있었는지는 글로 설명하기 어렵다. 한 잔 함께 하는 이들에게나 약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또 그 도움에 보답할 만한 능력을 가진 청년 하나가 그 자리에서 떠올랐다. 그러나 바로 얘기를 꺼내지는 않고 돌아와 하룻밤 숙고한 다음 메일을 보냈다. 짝짓기 방면에서는 나 자신의 성적이 워낙 안 좋아 그런 일에 나설 엄두는 내지 않고 살아온 데다, 여러 측면이 걸린 일이므로 잠깐 떠올랐다고 바로 꺼내기가 조심스럽게 생각되어서였다.

 

최 선생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는 채로 꼭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메일을 보냈다. 내 강연을 들으러 오겠다고 한 것이 있었는데, 그 발표문을 보내 드리고 메일 끝에 한 줄 붙였다. "앞서 메일로 말씀드린 일은 잊겠습니다."

 

며칠 후 강연에 부녀가 함께 왔다. 강연 후 셋이 맥주 한 잔 하는 자리에서 부녀가 二口同聲으로 간청한다. "앞서 메일로 말씀해주신 일 잊지 맣아 주세요." 최 선생은 딸에게 내 메일을 전달해 준 뒤 "지가 알아서 하겠지." 하고 딸은 그 메일 보고 솔깃해 하면서 "길을 더 열어 주시겠지." 하면서 한 달을 지냈다는 것이다.

 

꼭 1년 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리라는 전망을 그 시점에서 아버지도 딸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다. 두 분 다 내 의견을 무척 존중해 주는 분들인데, 어쩌다 보니 내가 의견 꺼낸 일을 한 달 동안 묵살하고 있었던 셈이 된 것이다.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다음 단계에서 내가 권한 무리수까지 따라 두게 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무리수란 최 선생네 세 식구를 몰고 거제의 이 선생 집으로 처들어가는 것이었다. 거제 가기 전에 이 선생에게 유진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냈다. 길게 쓸 필요도 없었다.

 

From: "김기협"
To: 이병한
Cc: 최유진
Sent: 2017-05-24 14:15 (GMT +0900)
Subject: 최유진 양을 소개합니다.

​이번 주말, 거제 다녀온 뒤에 정식으로 소개하려 했는데, 무슨 사정 때문에 거제 행이 1주일 늦춰졌어요. 소개를 그 뒤까지 늦추기는 너무 좀이 쑤시고 해서, 그냥 해치웁니다.

​소개문을 따로 작성하는 것보다, 유진 양과 지난 일요일에 주고받은 메일에 소개하는 내 입장과 소개당하는 유진 양 태도가 대개 나타나 있으므로 밑에 붙여 보여드립니다. 더 많은 정보를 원하면 메일로 문의하세요.

​이 메일에 피차의 주소가 들어 있으니 이제 알아서들 친구 하든지 뭘 하든지 알아서 하세요. 성의 없는 소개자라고 불평할지 모르겠는데, 나처럼 게으른 사람이 이만큼 나서는 것도 두 분을 보통 넘게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서 감지덕지하기 바랍니다.

​기협

연변에는 '사둔보기'란 행사가 있다. 바깥사돈 될 집에서 안사돈 될 집을 찾아가는 잔치인데 약혼식의 성격을 가진 것이다. 헌데, 신랑감에게 유진의 존재를 막 알리고 두 사람 사이에 메일도 트기 전부터 '사둔보기' 하러 가자고 나서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떻게 그토록 심하게 꽂혔는지 어리둥절한 일인데... 그걸 또 가잔다고 따라 나서는 최 선생네는 더 희한하다. 아무튼 6월 10일 전후해서 우리 내외와 최 선생네 세 식구, 다섯 명 일행이 2박3일로 거제에 다녀왔다. 이 선생 어른들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리고 당황했을까?

 

양가 부모들이 모두 나랑 두어 살 안쪽의 동년배다. 최 선생이야 물론 유진보다 먼저 알고 지낸 사이이고, 이 선생 부모님도 몇 해 동안 간간이 보면서 직접적인 교감을 약간이나마 갖게 된 사이다. 내가 바란 결합은 두 당사자 사이의 1 대 1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6자간의 유기적 결합이 되기를 바란 것이다. 아직 결혼이 실제적 의제로 떠오르기 전에 서로의 모습에 접하는 것이 각자의 입장에 갇히기 쉬운 사돈 관계를 넘어 인간적 이해와 신뢰를 심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조기 회담을 권한 것이다. 양가 어른들이 앞으로 마음 편하게 오가며 "이런 말 하는 게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조심할 필요 없이 아이들 흉을 함께 보며 지낼 수 있기 바란다.

 

유진과 병한은 붙여놓으니까 바로 불이 붙었다. 서로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이 넘쳐 이 세상까지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자라나는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도 세상을 바라보는 데도 어두운 마음이 많았다. 이제 행복-평화제작소를 차린 두 사람은 밝은 마음을 많이 일으키고 그 마음을 세상에 많이 퍼뜨려주기 바란다. "나는 바담 풍 하더라도..." 하는 훈장의 마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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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