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지난 연말 모스크바 외상회담 결정이 알려진 후 신탁통치 문제로 온 나라가 물 끓듯 합니다. 일본 지배에서 겨우 벗어나 독립을 바라보고 있는 터에 즉시 독립을 부정하는 조치가 반가운 것일 수는 없지요. 그런데 민심은 반가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극심한 분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분노로 인해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후세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안재홍:
감정적으로 치우친 면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지금 민심의 분노는 그럴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동은 이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거 없는 일시적 감정에 휘둘리는 행동은 잘못된 것이지만, 충분한 근거가 있는 감정이라면 개인의 행동이든 국가의 정책이든 그에 충실히 따라야 합니다.

신탁통치에 대한 분노의 근거는 독립을 바라는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을 힘껏 지키고 살려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해방이라는 상황에도 양면성이 있습니다. 일본의 억압에서 벗어난다는 좋은 면에 사람들이 들떠 있지만, 민족의 장래를 우리 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힘든 면이 또한 엄연히 있습니다. 이 힘든 면을 잘 처리하지 못하면 식민지시대보다 더 심한 고통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 힘든 면, 혼란의 위험을 극복할 열쇠가 독립을 향한 민중의 의지에 있습니다. 소작요율을 얼마로 하느냐, 국유화의 범위를 어디로 하느냐 등등 수많은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서로 양보하는 마음이 있어야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독립의 염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수록 양보의 마음을 잘 일으킬 수 있습니다.


김기협: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와 분노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모스크바 결정의 핵심은 신탁통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임시정부 수립을 앞세우고, 신탁통치의 필요 여부 결정에 임시정부가 참여하게 되어 있지요. 비록 신탁통치 여부를 혼자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도 임시정부가 제대로 세워지기만 한다면 임시정부의 결정에 연합국들이 반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어느 미국인 연구자는(브루스 커밍스) 모스크바 결정이 “사실상 ‘신탁통치 결정’이라고 볼 수도 없는 것”이라는 해석까지 내놓았습니다.

모스크바 결정은 민족주의자 누구라도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두 가지 조치를 담은 것입니다. 하나가 임시정부 수립 촉진이고, 또 하나가 38선의 철폐였습니다. 신탁통치는 나중의 일이고 확정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탁통치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스크바 결정 전체를 반대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태도가 아닐까요?


안재홍:
엄밀히 따지면 그 지적이 옳습니다. 38선 철폐는 정말 요긴한 일이죠. 막혀 있는 넉 달 동안 많은 문제가 자라나 왔습니다. 물자 소통의 단절로 일어난 민생 문제를 많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더 큰 문제가 양쪽 정치 환경의 차이로부터 자라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우익 대립이 격렬하고 혼란스럽게 되는 데 거기 큰 원인이 있습니다. 신탁통치에는 반대하더라도 38선 철폐에는 차질이 없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임시정부 수립은 정말 큰 과제입니다. 나는 기존의 임정이 앞으로 세워질 과도적 임시정부의 뼈대가 되기 바랍니다.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순탄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열리기 위해서는 임정 자체가 경직된 ‘법통론’을 벗어나 유연한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임정의 확장을 주장하는 ‘보강론’으로 현재의 임정 그대로를 주장하는 한민당의 ‘직진론’에 맞서 왔습니다.

모스크바 결정의 임시정부 수립 방침은 기존의 임정에게 위기일 수도 있고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법통에 너무 집착하면 새로 만들어질 임시정부와 대립하게 됩니다. 27년간 지켜온 깃발을 넘겨주면서 깃발을 지키던 사람들은 상징적인 위치로 물러서는 자세가 바람직합니다. 그것이 ‘임정’의 의미와 가치를 잘 살리는 길입니다.


김기협:
‘임시정부 수립’ 방침에 임해 임정과 인공의 통합 논의가 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12월 31일 저녁 임정의 성주식, 장건상, 최동오 3인과 인공의 홍증식, 홍남표, 이강국, 정백 4인의 회담에서 시작해 인공 측에서 제안서를 보냈으나 임정에서 접수를 거부했죠. 불완전하나마 정부 형태를 취해 온 두 조직이 통합한다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확고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안재홍:
통합의 타당성과 별도로 연말 연초의 논의 방식에 대한 생각부터 말하죠. 12월 31일의 모임은 공식 대표들의 정식 회담이 아니었습니다. 임정의 ‘접수 거부’를 인공 측에서는 ‘무성의’라고 비난했는데, 인공 측의 ‘무성의’를 먼저 얘기해야 합니다.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제안서를 보냈는데, 위원회를 열어 정식으로 결정한 정황이 전혀 보이지 않거든요. 인공이 몇몇 사람의 독단에 따라 움직인다는 이유로 위신을 잃은 지 오래됩니다.

임정과 인공 통일, 명분상으로는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두 조직의 성격이 너무 달라요. 임정은 넓은 폭의 정치적 성향을 가진 분들이 어울려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조직입니다. 12월 31일 모임에 나간 세 분을 비롯해 ‘비주류’로 통하는 분들, 임정 내에서 내 ‘보강론’을 적극 지지해 주는 분들인데, 비록 비주류라 하지만 그분들의 의견도 임정 내에서 상당한 존중을 받아요.

반면 인공은 ‘비주류’가 없는 조직입니다. 나는 우익으로 통하는 사람이지만 좌익에 대해 반감이 없어요. 그래서 건준 일에도 나섰던 겁니다. 그런데 책략을 통한 좌익의 건준 장악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인공은 책략으로 생겨났고, 지금까지도 책략으로 운영되어 온 조직입니다. 인공 운영자들은 인공을 받들지 않고 이용해 왔습니다. 임정과 인공이 통합된다면 그들은 그 통합체를 받들기보다 이용하러 달려들 것이 불을 보듯 빤한 일입니다. 임정은 보강되어야 하지만, 그런 요소로 보강되어서는 안 됩니다.


김기협:
선생님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을 줄곧 중시해 왔습니다. 몽양 선생과 함께 한 건준을 통해서든, 이승만 박사의 독촉을 통해서든, 임정 비주류가 제안한 특별정치회의든, 정치 통합의 길만 보이면 성심껏 참여하려고 애써 왔습니다. 국민당의 공식 성명을 통해 정치 통합이 이뤄지면 당을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연합국 사이에서 신탁통치 방안이 논의된 것을 보며 조선인의 자치능력을 무시했다는 불만과 함께, 과연 조선인이 자치능력을 제대로 발현해 왔는지 반성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반성이 제일 두드러진 표적이 정치적 분열과 혼란입니다. ‘민족통일전선’의 성립이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앞으로 그 전망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그 성공을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뭐라고 보시는지요?


안재홍:
반성이 일어나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연합국들의 눈에 우리가 어찌 보일까를 의식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더 투철하게 알아볼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전선의 전망을 된다, 안 된다, 한 마디로 잘라 말할 수 없습니다. 되기를 바라며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마음을 가다듬을 뿐입니다. 연합국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넘어 진정한 독립의 절대요건입니다.

민족통일전선의 목적은 민족의 자결(自決)이 보장되는 하나의 민족국가로 독립하는 것입니다. 민족국가 독립이라는 염원을 우리 민족의 99%가 공유한다고 나는 믿습니다. 일부 악질 친일파 외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염원이라고 믿습니다. 친일파의 오명을 짊어진 사람들 중에도 민족 해방의 새로운 상황 속에서 과거를 반성하고 독립의 대열에 동참하려는 이들이 많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립의 염원이라는 민족 대의(大義)를 등지는 사심(私心)이 차츰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쪽에는 식민지시대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친일파의 준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이념에 집착하는 극좌 모험주의자들의 책략이 있습니다. 민족통일전선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런 사심의 대두를 가라앉혀야 합니다.

사심은 누구의 마음에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심을 버릴 것을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지금은 사심을 좀 접어두자는 것뿐입니다. 사심이 고개를 드는 것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입니다. 내가 임정을 힘껏 받드는 것은 그 지도력이 사람들의 불안감을 해소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김기협:
그렇습니다. 최근 상황 전개를 보면 마치 통일된 민족국가를 바라지 않는 것 같은 행동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월 7일의 4당 코뮤니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되 연합국 외상회담 결정은 존중한다는 매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노선인데, 한민당이 이것을 파기했지요. 한민당이 마치 신탁통치가 모스크바 결정의 전부인 것처럼 호도한 것이 사실은 통일국가 건설을 회피하는 술책이었다고 후세 사람들은 흔히 생각합니다. 친일을 배척하는 통일국가보다 친일을 옹호하는 분단국가를 원한 것이라고요.

그리고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입장을 너무 극적으로 번복한 공산당도 문제죠. 그런 극적인 번복은 사안의 본질을 고민하지 않고 책략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대세를 받아들이는 대신 책략을 통해 자기네 입장만 내세우는 것은 역시 사심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이런 추세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을 선생님은 “장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불안감이 늘어나는 까닭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안재홍:
해방의 감격이 온 사회를 휩쓸던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감격이 희석되는 것은 인간세상의 어쩔 수 없는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해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장래에 대한 더 확실한 자신감을 키워내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불안감이 늘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8선 이남과 이북의 지금 상황을 비교하면 미군정의 속성에도 적지 않은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넉 달 전에는 다 같은 민심이었는데, 지금은 남쪽 민심이 훨씬 더 불안하지요. 미군정의 정책 중에는 아무 악의가 없는 것인데도 큰 부작용을 일으켜 민심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 많습니다. 미곡시장 자유화 같은 것이 그런 예죠. 여간 아닌 풍년인데도 도시민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것이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그 정책 때문 아닙니까? 그로 인해 지주들이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에 한민당의 로비에 넘어간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는 보지 않습니다. 식량 같은 기본정책에 그런 로비가 통한다면 그건 군정청이 아니라 강도단이라고 해야겠지요.

당장 현안인 신탁통치 문제에도 10월 20일 ‘빈센트 발언’ 이후 군정 당국자들의 태도가 민심을 가파르게 만든 면이 있습니다. 신탁통치 가능성은 조선 독립 방침을 명언한 2년 전의 카이로선언 이래 연합국 사이에 상식으로 통해 온 것입니다. 미국이 신탁통치에 반대했다는 <동아일보> 기사가 있었지만, 정황으로 봐서는 미국이 신탁통치를 제안했다고 하는 공산당 측 주장이 맞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국무성 주무국장인 빈센트의 발언과도 맞고요. 그와 어긋나는 아놀드와 하지의 주장이 무슨 의도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소문으로 듣는 이북 상황과의 차이가 남쪽 사람들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왜 미군은 식민지 통치체제를 그대로 두는가? 거기에 종사하던 경찰과 관리들의 손에 그대로 맡겨두는 까닭이 무엇인가? 식민지든 군정이든 이민족의 지배는 다 똑같이 억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신탁통치에 대한 남쪽 민심의 반감이 더 격렬한 데는 미군정의 성격이 적지 않은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