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초부터 1905년 7월 사이에 한국인 7,226명이 65척의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다. 이로써 인접국이 아닌 나라로는 미국이 가장 큰 교민집단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재미 교민집단은 그 후 해방 때까지도 크게 늘어나지 않았다. 정병준의 <우남 이승만 연구> 213쪽에 인용된 <MIS 비망록>(1943. 3. 19)에 따르면 1940년 미국에는 하와이의 6,851명을 포함해 모두 8,562명의 한국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2백만에 이르던 중국 교민, 수십만에 이르던 러시아 교민에 비하면 아주 작은 교민집단이었지만,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여건 때문에 민족운동의 에너지가 쉽게 발산될 수 있었다. 1908년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계기로 국민회(대한인국민회)가 결성된 이래 미국 교민사회는 해외 민족운동의 한 중요한 기지가 되었다. 미국 교민사회의 임시정부 지지는 임정의 권위에 큰 뒷받침이 되었을 뿐 아니라 중요한 재정적 기반이던 시기도 있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하자 재미 교민집단은 미국 한국 사이에서 가교의 역할을 맡을 잠재적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재미 교민의 통일 기관으로 설립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대표 6인이 하지 사령관의 초청으로 11월에 국내에 들어와 제반 사정을 살펴본 끝에 시정 방침 건의안을 군정청에 제출했다. 대표단 활동에 관한 기사 중 눈에 띄는 것이 있다.


在美 韓族聯合委員會 대표단 金秉煥은 明年 1월 10일 국민대회와 임시정부 계획인 特別政治委員會에 대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우리 대표단이 귀국후 약 2개월간에 국내정세와 민간여론 파악에 노력하여 왔던 것이다. 우리는 一黨 一派의 주의주장에는 추종할 수 없다. 따라서 明年 1월 10일 개최될 국민대회에도 우리 태도는 분명하다. 즉 韓國民主黨 측에서 개최한다는데 우리는 이 대회에 참석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特別政治委員會는 臨時政府에서 국내 국외 인사들과 국가독립촉성을 목표로 협의한다고 하니 우리는 미약한 힘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참석할 것이다.”  (<자유신문> 1945. 12. 27)


한민당과 이승만이 기획하고 있던 국민대회에 불참하면서 임정 중심의 사업에는 협력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재미 교민사회를 발판으로 30여 년간 활동해 온 결과 해방 후 국내에서 한 개인으로서는 최대의 정치적 권위를 가진 위치에 올라가 있었지만, 교민사회를 대표하는 입장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대표성의 한계 정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한국인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로 규탄하는 극단적 반대자들까지 있었다. 이승만이 임정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자격으로 미국인 업자에게 이권을 팔아넘겼다는 ‘광산 스캔들’을 1946년 초에 터뜨려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낙마시킨 한길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자신의 처신과 행적에 반대를 불러일으킨 면이 크다. 그는 도덕적 실천으로 지도력을 키우기보다 책략을 통한 영향력 확보에 몰두해 왔고, 그 책략은 혼란과 분열의 수단을 흔히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초년의 행적은 차치하고, 그의 활동이 저조했던 1930년대를 지나 외교활동을 재개하는 1938년 이후의 일을 살펴보겠다.


재미 교민사회의 민족운동은 1920년대를 지나는 동안 열기가 식었다. 지나친 분열상에서 이유를 찾기도 하지만, 더 기본적인 조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대공황에 이르는 경기 침체로 교민사회의 여력이 줄어든 것이고, 또 하나는 교민집단의 고령화였다. 재미 교민집단에는 신규 이주자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초기 이주자들은 활동력이 줄어드는 반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청소년층은 민족의식이 높지 않았다.


중일전쟁 개전 이후 일본의 침략전선이 확장됨에 따라 재미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새로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떠올랐고, 또 미국 사회에 반일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39년 3월 하와이를 떠나 워싱턴으로 옮겨가고, 이어 임정에 구미위원부의 부활을 요청했다. 구미위원부는 1919년 4월 이래 이승만의 활동 근거였다가 1925년 봄 이승만 탄핵-면직과 함께 폐지된 기관이었다. 임정은 이 요청을 거부했다. 재미 민족운동이 다시 활성화되어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연합회)가 출범하면서 이승만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선정하자 임정은 비로소 주미외교위원부를 승인했다.


주미외교위원부를 둘러싼 파란은 이승만이 위원부를 개인 조직처럼 활용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미-일간 개전으로 한국인의 민족운동이 활기를 더함에 따라 위원부의 할 일도 많아졌는데 이승만은 자기 계열 이외 사람의 위원부 참여를 거부했다. 1943년 1월 국민회가 항의를 제기했으나 이승만이 독단적 태도를 고치지 않아 결국 1943년 10월 연합회에서 임시정부에 이승만의 소환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외교위원부가 형식적으로는 임시정부 산하기관이지만 실제로는 연합회의 지원으로 성립-유지되는 조직이었다. 그런데 중경 임정은 1년 이상 계속된 이 분규에서 모든 원칙을 어겨 가며 이승만을 지지했고, 이로 인해 연합회가 분열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구가 이승만에 대해 이 시점에서 “전폭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신뢰가 없더라도 김구가 이승만 편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미국에는 집중화된 정보기관이 없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느끼고 윌리엄 도노반 대령에게 설치 계획을 맡겼다. 도노반은 1941년 7월 우선 COI(Co-ordinator of Information)를 만들었고, 이것이 1942년 6월 OSS로 확대되었다. 다시 CIG를 거쳐 CIA에 이른 것은 1946년의 일이다.


이승만은 COI 시절부터 도노반의 2인자 프레스턴 굿펠로우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한국인 요원 몇을 OSS 대원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1943년 들어 OSS가 특수부대 훈련 등 중국에서 활동을 늘리자 이승만은 자기가 추천한 OSS 대원들과 통신시설을 이용해 중경 임정과 긴밀한 연락을 취할 수 있었다.


임정은 유명무실한 광복군을 만들어놓고도 그 지휘권을 중국군에 맡겨놓은 상황에서 광복군 확충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OSS에 대한 영향력을 과시하는 이승만을 김구는 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들어 장준하와 김준엽 등이 참여하는 광복군 국내 투입 작전도 OSS에 의지해 진행시킨 것이었다.


이승만은 김구와 임정의 절대 지지를 발판으로 외교위원부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임정의 뒤통수를 치는 공작을 진행하기까지 했다. 외교위원부 안에 ‘협찬부’라는 이름으로 내무, 경제, 교육, 정치 등 여러 부서를 설치하려 한 것이다. 1944년 5월 24일 그는 이들 부서에 임명한 측근 인사들에게 친비(親秘) 서신과 함께 사업계획서를 보냈는데, 계획서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새로 수립한 정치 기관의 각 위원부는 완전히 외교위원부의 지명하는 권력 범위 아래 제한되었으며 (...) 새 정치조직체는 한국의 내무와 경제와 교육과 정치와 전쟁 노력을 현시 전쟁 기간과 전쟁 후에 공히 지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우남 이승만 연구> 234쪽에서 재인용)


제2의 임시정부를 만들려 한 것이었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 ‘양파’론이 유행하는데, 이승만의 음모와 책략이야말로 까도까도 끝이 없는 ‘원조 양파’라 할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