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오후 4시경 김포비행장에 도착했고, 김구 이하 15인 일행은 5시 조금 지나 경교장에 도착했다. 서대문 바로 안쪽, 지금의 강북삼성병원 본관 건물이다. 당시의 도로사정에 비추어 참 빨리도 들어왔다. 환영 행사도 없었고 인파도 없었다.

 


김구 일행의 숙사로 되어있는 죽첨정 최창학 댁은 수일 전부터 말끔히 치워져 먼지 하나 없이 청결하였다. 숙사 안팎에는 미리 들어와 있는 광복군의 일 소대 가량이 삼엄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지난 5일 일행이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왔다는 소식을 들은 후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기에 가슴을 조이던 환영준비위원회에서도 23일 오후까지도 전연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오후 다섯 시 다섯 대의 자동차가 갑자기 최창학 댁 정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순간 이 주위는 조심스러운 가운데도 몹시 바쁘고 당황해졌다. 여섯 시 방송에 뜻하지 않게 하지 중장의 발표에 의한 김구의 귀국을 전하자 서울시민들은 저으기 놀래었고 또 반가웠다. 행인들은 일부러 죽첨정 동양극장 앞을 지나다가 발을 멈추고 숙사의 대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대문 앞에는 엠피와 광복군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날 밤은 일체 어떠한 사람도 면회를 시키지 않기로 하고 여로의 피곤한 몸을 쉬기로 되었다. (서울신문, 1945. 11. 24)


‘경교장’은 나중에 붙인 이름이고 당시에는 죽첨정(竹添町)에 있다 해서 ‘죽첨장’이라 흔히 불렀다. ‘죽첨’은 갑신정변 당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를 기념한 이름이다. 저택 소유자 최창학(1891~1959)은 식민지시대에 많은 금광을 보유, ‘금광왕’이라 불린 거부로, 돈으로 할 수 있는 친일 행위는 빠트리지 않고 한 사람이다. 경교장 제공뿐 아니라 당시의 우익에 많은 자금을 내놓은 덕분인지, 김구가 죽은 직후인 1949년 8월 반민특위의 불구속 조사를 받고 큰 제재를 받지 않았다.


정각 6시에 하지 중장의 짧은 성명이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하였던 애국자 김구 선생은 개인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6시 조금 지나 이승만이 찾아왔고, 뒤이어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김구도 기자들과 몇 마디 문답이 있었지만 말을 몹시 아꼈고, 8시에 선전부장 엄항섭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미군 헌병들과 함께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던 ‘광복군’은 과연 김구의 명령을 받는 광복군이었을까? “여로의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 이 날 중 어떠한 사람의 면회도 (이승만 빼고) 시키지 않기로 한 것은 누구의 결정이었을까? 임정 측 결정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미군정 당국자들이 설마 임정 요인들을 영구히 격리해서 관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를 꺾어놓으려는 생각을 한 것일까? 그러나 하지의 짤막한 성명이 방송을 타자마자 서대문 방면으로 몰려드는 인파를 보며 그들도 놀랐을 것이다.


임정의 실제 모습과 상황을 소상히 아는 사람은 당시 한국에 많지 않았다. 그러나 임정의 존재는 모두 알고 있었다. 갑자기 펼쳐진 해방의 상황 앞에 이 사회가 어떻게 움직여 갈지, 기쁜 마음의 한편에는 불안감도 있었고 막막함도 있었다. 100일이 지나도록 갈피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이 불안감과 막막함을 벗어날 길을 임정이 찾아 주리라고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언제나 끝이 날지, 과연 끝이 나기나 할지, 내다볼 길 없이 살아온 수십 년 동안 한결같이 해방과 독립을 바라보며 객고를 견뎌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 말고 누구에게 독립의 길을 묻는단 말인가?


도착 이튿날 오후가 되어서야 김구의 방송 연설을 군정청이 허가하기로 결정한 것은 여론에 눌린 셈이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은 단 2분. 주례 방송시간을 갖고 있던 이승만의 대우와 대비된다. 국민은 듣고 싶어 하고 본인은 말하고 싶어 하는데, 방송을 이렇게 운영하는 것이 미군정의 ‘언론 자유’였다.


200여 자에 불과한 연설이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27년간이나 꿈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들여 놓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나는 지난 5일 중경을 떠나 상해로 와서 22일까지 머무르다가 23일 상해를 떠나 당일 경성에 도착되었습니다. 나와 나의 閣員 일동은 한갓 평민의 자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는 여러분과 같이 우리의 독립완성을 위하여 진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전국 동포가 하나로 되어 우리의 국가 독립의 시간을 최소한도로 단축시킵시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기회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기에 오늘은 다만 나와 나의 동료 일동이 무사히 이곳에 도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자유신문 1945년 11월 26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