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7. 10:44

 

똑똑한 애들 다 모아놨다는 경기학교에서 나도 천재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아마 5년간 아무 존재감 없이 지내던 조용한 넘이 고3 되면서 갑자기 시험 잘 치는 재능을 드러내는 바람에 친구들이 충격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는 고3 되면서 그런 식으로 사고 치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고3 되면서 치기 시작하는 월례 모의고사의 시험 스타일이 정규시험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었다. 영-수-국 세 과목 시험을 서울대 입시 스타일로 치르고 난이도를 엄청 쎄게 하니까 상층부의 변별력이 엄청 크게 나타난다. 그래서 정규시험에서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던 친구가 한 과목에서라도 강점을 보이면 크게 눈길을 끌고 "영어 도사", "수학 도사" 타이틀을 딴다. 나는 워낙 사고를 크게 쳐서 "전 과목 도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했다.

 

그런데 "도사"라는 타이틀이 진짜 어울리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수학 한 과목에서는 2등이 보이지 않는 1등을 독점하고 지냈다. 2등 그룹이 60점 전후라면 그 친구는 80점, 속인들과 뚝 떨어진 경지에서 혼자 노닐었다. 마침 성도 구 씨였는데, "도사"란 말 유행한 것이 그 무렵 인기를 끈 무협소설 정협지의 "瞿 도사" 때문이어서 그 친구는 "구 도사"로 통했다.

 

이 구상진이라는 친구는 불교학생회에도 함께 다녔고 고3 올라갈 무렵에는 나랑 함께 물리학과를 지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사이였다. 가까운 사이일 뿐 아니라 나는 그 친구를 매우 좋아했다. 사람 좋아하는 이유에 꼭 분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수학 도사" 얘기를 꺼낸 참이니 그의 "수학 마인드"에 마음이 끌린 점은 말할 수 있다. 그가 수학 문제 잘 푼 것은 별다른 기능을 갖춰서가 아니라 쓸 데 없는 요소들을 쉽게 배제하고 요점에 집중하는 능력 덕분이었다고 그때도 생각했다.

 

입학원서 제출을 불과 몇 주일 앞두고 이 친구가 법학과로 지망을 바꿨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보다도 훌륭한 물리학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유일한 친구였는데. 법률 같은 분야에도 수학 마인드가 필요한 구석이 있긴 하겠지, 하고 넘어갔다.

 

구상진은 무난히 법학과에 합격했고, 졸업 전에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학 졸업 후 몇 해 못 보고 지내다가 1980년에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검사직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만나서 사연을 들었다. 반공법 피의자 하나를 "무혐의 불기소" 처분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피의자인 학생이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주장을 하는데 이 친구 보기에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으니 "자백이 유일한 증거일 때에는 증거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원리에 의거해 본인 주장을 묵살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군부 유력자들의 성미를 건드려 옷을 벗게 되었다고 했다.

 

이 얘기를 듣고 "구상진답다"고 생각했다. 좌파고 나발이고, 자백의 증거능력에 관한 원리가 분명한 이상 다른 것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 아닌가. 그 날 저녁 술이 얼큰해지자 좀 이상한 소리도 나오곤 했지만(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체벌의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둥) 역시 수학 도사다운 의견으로 가상하게 생각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더욱더 좋아하게 되었다.

 

의사인 부인에게 "Wife Grant"를 받아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더니 얼마 후 서울시립대 교수로 들어갔다. 간간이 얼굴 보며 지내다가 1990년 내가 학교를 떠난 후 다시 적조해졌다.

 

2002년엔가? 평생 유일하게 법정에서 다툴 일이 생겼을 때 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고, 거기 응해 주어서 회포를 풀 기회를 가졌다. 그 무렵 가족법인지 호적법인지 문제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나는 못마땅했다. 그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세상 일에 일리가 하나둘인가? 자기 주장을 하나의 의견으로 내놓는 데 그친다면 친구로서 계속 좋아하겠는데, 현실적인 사업으로 밀고 나가는 데는 찬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만난 나까지 자기 주장에 승복시키려고 기를 쓰는 데는 딱 질색이었다. 그 무렵 어느 당의 국회의원 공천을 바라본다는 이야기에 겹쳐져, 이 친구가 수학의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대리인단에 이 친구가 이름 올린 것을 보며, 물리학도의 길을 버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든다. 고종인지 외사촌인지 사촌 자형이 김기춘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김기춘의 이력을 검색해 보니 1968년 우리가 대학에 진학할 때 10년 연상의 김기춘이 평검사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을 때였겠다. 그가 재주있는 처사촌이 자기 길을 따라오도록 권유한 게 아니었을지. 1980년 구 검사가 옷 벗을 때는 김기춘의 기세가 잠시 수그러졌을 때였고.

 

이제 구상진의 기억을 추억의 서랍 속에 쟁여둔다. 나보다는 확실한 천재로 여겼던 또 하나 친구의 기억과 함께. 공과대로 진학했다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현수. 동급생들보다 한 살 아래였고, 그 한 살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질 만큼 순진한 성품이었던 현수는 고등학교 시절에 언어 능력이 놀랄 만큼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그가 오래 살았다면 대외적 성취는 차치하고, 적어도 사회와의 소통에는 나나 구상진보다 훨씬 나았을 것이다.

 

'기억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여름을 보내며  (2) 2019.01.13
"빛나는 일등병"  (1) 2017.08.12
다테노 아키라 선생이 일으켜준 감동  (4) 2013.07.08
제도권 밖에서 공부하기: 서중석과 나  (2) 2013.06.08
잘 있거라~ 나는 간다~  (0) 2013.01.1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