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中國 진입과 정착

 

마테오 리치는 1552년 이탈리아 중부의 소도시 마체라타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죠바니 바티스타 리치는 약사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마체라타 시장 직을 얼마 동안 맡기도 했다고 한다. 명예를 겸비한 시골 유지의 집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테오는 94녀 중의 맏이였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주선으로 마테오는 어렸을 벤치베니라는 이름의 신부에게 개인교수를 받았는데 이 신부는 마테오가 일곱 살 때 예수회에 가입하기 위해 떠났다. 이것이 어린 마테오가 예수회와 가진 첫 인연이었다. 2년 후에는 마체라타에 예수회의 학교가 생겼고 마테오는 이 학교에 다녔다.

열여섯 살 때 리치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로마로 떠났다. 그러나 3년 후 리치는 아버지와 상의도 없이 예수회 가입을 신청했다.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예수회 방계조직인 마리아 교우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아 聖職을 향한 리치의 소망은 일찍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아버지는 리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로마로 오는 도중에 병이 나서 부득이 발길을 돌리고 마지못해 리치의 결정을 승인했다고 한다.

예수회에 가입한 리치는 로마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해외선교를 지원했다. 그의 지원은 1577년에야 받아들여져 인도선교의 명을 받고 그해 여름 포르투갈로 떠났다. 동방의 파드로아도인 포르투갈왕이 교황과의 협정을 통해 동방으로 떠나는 모든 선교사들을 지원할 의무화 함께 그들을 관할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임브라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며 배편을 기다리던 리치는 다음해 313명의 동료 예수회 선교사들과 함께 인도행 배에 올랐다.

그중에는 3명의 이탈리아인 동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리치의 이후 활동에 상당히 중요한 관계를 가졌다. 루지에리는 1583년에 리치와 함께 중국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파시오(Francesco Pasio, 1551-1612)는 중국선교에 가담하려다가 일본으로 옮겨졌지만, 중국선교까지 포괄하는 일본관구장, 그리고 극동순찰사가 되어 리치의 노선을 옹호하는 후원자가 된다. 아콰비바(Rodolfo Aquaviva, ?-1583)는 무굴제국 선교에 활약하다가 일찍 순교했지만, 1581년 예수회 총장으로 취임한 클라우디오 아콰비바(1543-1615)의 조카로 리치와 총장 사이를 이어주는 고리가 되었다.

6개월 항해 끝에 리치 일행은 15789월 고아에 도착했다. 포르투갈 동방경영의 중심지인 이곳은 가톨릭 동방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리치는 이곳에서 3년 반을 지내는 동안(요양을 위해 코친에서 1년 지낸 것을 포함해서)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신부서품을 받았다. 신부서품을 앞서 받은 루지에리는 1579년 발리냐노에게 마카오로 불려가서 중국선교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리치는 파시오와 함께 1582년 봄 발리냐노의 부름을 받아 고아를 출발하여 8월 초 마카오에 도착했다. 2년 반의 첫 일본체류를 마치고 마카오에 돌아온 발리냐노는 일본 경험을 통해 적응주의 노선에 대한 구상을 더욱 구체화시켜 놓고 있었다. 그동안 준비를 해 온 루지에리만으로는 중국진출 계획에 부족하리라고 판단한 발리냐노는 고아에 연락해서 리치와 파시오를 중국선교요원으로 불러온 것이다.[49]

[49] V Cronin, The Wise man from the West (London, 1955): 16-35.

마카오는 고아, 말라카에 이어 포르투갈이 가장 동쪽의 기지로 확보한 곳이었다. 포르투갈인은 1511년 인도양과 남지나해의 길목인 말라카를 점령한 후 남지나해의 활동을 시작하고 1517년 처음으로 廣州에 기항해 교역을 시작했다. 중국 관헌은 처음 이들을 다른 조공국 사절들과 마찬가지로 대접해서 교역을 허락했으나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중국과의 관계에 익숙지 않은 포르투갈인은 지나친 욕심과 난폭한 행동으로 중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또 중국에 조공을 바쳐 온 말라카가 이들에게 정복된 것이 알려지면서 중국 관헌은 이들의 내왕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은 무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중국 측도 교역의 이익을 위해 이들을 차츰 포용하게 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정해진 기일에 廣州에 입항을 허용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上川島(사비에르가 죽은 곳)에서만 교역을 허용하기도 하다가 1555년 마카오의 반도 끝에 근거지를 만들도록 허락함으로써 오늘날까지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아 있는 마카오의 도시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50]

[50] 마카오 정착 허가는 비공식적인 것이어서 정확한 設市 年度에 대해 1555년에서 1557(주교좌 설립년도) 사이에 약간의 이론이 있지만 대개는 1555년으로 통용된다. C Boxer, Fidalgos in the Far East (The Hague, 1948): 2-5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2vols, Chicago, 1965-70): 742, 745.

리치의 마카오 도착 때, 만들어진 지 이십여 년의 이 신흥도시에는 1만가량 인구가 살고 있었다. 대부분 중국인이었고 포르투갈인은 1천 명 이내, 그리고 포르투갈인이 데려오거나 이곳 상업을 찾아온 말레이인, 인도인, 흑인 등이 약간 있었다. 고아와 말라카, 그리고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정기항로가 이 도시의 생명선이었다. 포르투갈인은 이 항로를 통해 반입한 외래의 화물, 일본의 과 남양의 香木 등을 廣州시장에 팔고 비단, 도자기 등 중국의 상품을 사서 같은 항로를 통해 반출했다.

고아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카오의 선교사들은 포르투갈인 사회 안의 종교적 기능과 시내에 거주하는 현지인에 대한 강압적 포교 정도 활동에 머물러 있었다.[51] 그들은 포교를 위한 조건이 (그들 표준으로 볼 때) 갖춰져 있지 않은 중국 본토 선교를 불가능한 일로 여기고 그 준비를 위해 중국어 학습에 선교사의 시간을 쓰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해서 발리냐노의 중국선교 프로젝트에 비협조적이었다.

15823,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발리냐노는 중국선교의 기반으로서 마카오의 선교분위기를 일신하는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일본과 마카오의 선교단장을 교체하고 중국선교요원들을 일상적 업무부담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중국인 개종자의 포르투갈화를 억제하고 선교사들의 중국화를 요구했다. 그는 이 여러 가지 조치가 지속적으로 보장되도록 예수회 총장 아콰비바에게 직접 편지로 탄원하기도 했다.

리치의 기록을 보더라도 발리냐노가 적응주의 노선을 고취하기 위해 얼마나 교묘한 방법을 썼는지 여실히 알아볼 수 있다. 그는 예수聖名 교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 단체는 새 개종자의 정신적 훈련에 적합한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이 단체의 운영을 중국선교요원들에게 맡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마카오의 선교분위기를 바꿔 나가는 근거를 만드는 동시에 중국선교요원들에게 중국 내지선교를 위한 효과적인 훈련 조건을 만들어준 것이다.[52]

[52] <中國誌> 135.

이때 특이한 기회 하나가 나타났다. 15824福建省 해안에 무단상륙한 스페인인 일행이 5월에 廣州로 압송되었다. 兩廣총독 陳瑞는 이 문제 처리를 위해 마카오 시장주교가 총독부 소재지인 肇慶의 아문에 출두하도록 요구했는데, 발리냐노는 루지에리를 주교 대신 보냈다. 중국어와 중국 교양을 얼마간 익힌 루지에리에게 좋은 인상과 좋은 예물을 받은 총독은 그에게 肇慶에 와서 살도록 허락했다. 발리냐노는 파시오를 루지에리와 함께 肇慶에 보내고 고아로 떠났다.[53]

[53] <中國誌> 136-139: 이때 리치 대신 파시오를 보낸 것은 일본선교에 배정되어 있던 파시오를 임시로 보내고 리치는 마카오에서 준비를 더 한 뒤 장기계획에 임하도록 한 조치로 보인다.

중국 정착을 위한 이 기회는 오래지 않아 도로 무산되었다. 1583년 초 총독이 소환되었는데,[54] 떠나기 전에 서양인들을 肇慶에서 내보냈다. 서양인의 內地 거주를 허용한 것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에 불리하게 작용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한 것이다. 파시오와 루지에리는 廣州에라도 자리 잡을 수 없을까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카오로 돌아온 뒤 파시오는 원래의 임지였던 일본으로 떠났다. 새 총독이 부임한 후 이 기회를 되살리기 위해 루지에리와 리치가 廣州에 가서 海道에게 탄원했으나 아무 효과 없이 돌아왔다. 도중에 마카오를 관할하는 고을인 香山현 성문에 새 총독의 포고문이 다음과 같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54] 陳瑞張居正 탄핵에 연루되어 遞職되었다. <明 神宗實錄> 132, 萬曆 11년 정월 壬戌(8)陳瑞 등이 에 연루된 혐의를 기록한 뒤 上命 殷正茂 陳瑞 致仕라 하였고, 丁丑(23)陞廣西巡撫右僉都御史郭應聘 爲右都御史兼兵部右侍郞 總督兩廣이라 하였다.

 

公益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일 외에, 마카오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관한 일로 다음과 같이 근심스러운 상황이 있다. 외국인들에 고용된 중국인 통역들이 끊임없이 저지르는 온갖 죄악과 범법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있어 왔다. 그들은 외국인을 끌어들이고 중국의 여러 가지 비밀을 가르쳐준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 통역들이 외국인 승려들에게 중국의 말과 글을 배우도록 설득해 왔으며, 그 승려들은 우리 省都에 사원과 주거를 짓기 위한 거주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아무런 이득도 얻을 것이 없는 우리 중국에 대해 이런 획책은 해로운 것일 뿐임을 명백히 선포한다. 위에 말한 통역들이 이런 행실을 당장 그치지 않는다면 가차없이 극형에 처할 것임을 아울러 밝힌다.”[55]

[55] <中國誌> 140-144.

 

이렇게 그들이 모든 희망을 잃고 마카오에 돌아온 지 불과 1주일이 안되어 그들의 거주 청원을 받아들일 듯한 소식을 肇慶으로부터 받았다. 15839월 초순 肇慶으로 다시 간 루지에리와 리치는 王泮[56] 知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그들의 신분과 출신, 肇慶에 살고자 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천주님을 유일신으로 모시는 종교에 몸 바친 사람들의 단체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출발한 곳은 서쪽으로 아득히 먼 곳이며, 중국의 위대한 명성과 광영을 흠모하여 삼년에서 사년에 걸친 여행 끝에 이곳에 이르렀습니다. 마카오에서 우리의 종교생활을 방해하는 상인들의 소란한 왕래와 세속의 번잡을 떠날 수 있는 곳에 몸담을 작은 집과 예배를 위한 작은 건물을 짓도록 허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목적은 여기에 있으며, 이곳에 거처를 만들어 여생을 모두 지내고자 합니다.”[57]

[56] 王泮에 대해서는 M Destombes, "Wang P‘an, Liang Chou et Matteo Ricci: Essai sur la cartographie chinoise de 1593 a 1603"(Actes du Ille Colloque International de Sinologie, Chantilly, 1980. Paris, 1983)에 약간의 설명이 있다. <明人傳記資料索引>에는 嘉靖間(1521-66)進士를 하였다고 하는데, Destombes1539년생이라 한 것과 맞추어 보면 아주 젊은 나이에 관계에 들어선 것을 알 수 있다. 성품이 恬淡하고 생활이 儉素, 廉潔한 관리였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57] <中國誌> 147.

그들은 知府가 이 청원을 들어줄 것을 간곡히 빌며, 들어줄 경우 그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 중국의 법을 어기지 않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知府는 루이에리와 리치에게 원하는 장소를 찾아보도록 허락했고, 선교사들이 이튿날 한 장소를 결정, 知府에게 알리자 知府도 이 장소를 좋게 여겨서 자리 잡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한다.[58]

[58] <中國誌> 148-149.

肇慶 정착 이래 여러 해 동안 선교소를 지탱한 것은 루지에리와 리치의 두 사람이었지만, 적응주의 노선을 중심으로 중국 선교의 방침을 형성해 나간 주역은 리치였던 것 같다. 루지에리는 중국어 학습을 리치보다 먼저 시작했으면서도 1588년 중국을 떠날 때까지 중국어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리치보다 중국에 먼저 들어왔으면서도 중국 풍토에 맞는 선교자세를 다듬어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1585王泮의 고향인 浙江省 紹興에 초대받아 머무를 때도 무리하고 무모한 행동으로 王泮과의 관계를 악화시킨 일이 있고,[59] 1587년 다시 廣西지방을 여행하면서 그곳에 사는 황족을 방문하겠다고 고집을 피워 물의를 일으켰는데, 이것이 중국 철수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60] 명나라의 황족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채로, 그를 통해 황제에게 선을 대어 볼까 하는 헛된 희망에 불타서 廣西순무를 비롯한 관리들을 모두 찾아다니며 소란을 피운 것이다.

[59] <中國誌> 181.

[60] <中國誌> 182-183.

이 일이 肇慶에 알려지자 嶺西道尹知府 등 선교사들과 관계를 가졌던 관리들이 모두 난처한 입장에 빠졌다. 여기에 겹쳐 루지에리가 억지로 찾아가 좋지 않은 인상을 준 廣西 순무가 얼마 후 兩廣 총독으로 오게 되었으니,[61] 그 휘하에 들어갈 관원으로서 선교사들의 존재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위험이 이들에게 닥친 것이다.

[61] <明 神宗實錄> 201, 萬曆 167己巳(18), “陞廣西巡撫劉繼文 兵部右侍郞 總督兩廣軍務.”

이에 겹쳐서 선교사들의 肇慶 정착에 문제를 일으킨 것은 주민과의 갈등이었다. 돌팔매질 한 아이를 붙잡았다가 납치 혐의로 고발된 일이 있었고(1585년 봄?), 1588년 봄에는 군중의 선교소 亂入이 있었고(洪水피해의 복구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 여름에는 廣州 長老들이 선교사들을 察院에 고발한 일이 있었다.[62]

[62] <中國誌> 163-165, 191-193, 195-197.

리치는 중국인들, 특히 肇慶 주민들이 선교사들에게 반감을 가진 이유 몇 가지를 제시했다.[63] 관리들과의 우호관계에 대한 질투심. 그리고 중국인들이 타고난 외국인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변방에 위치해 있고 포르투갈인의 활동을 보게 된 廣東 사람들에게 특히 심하다는 사실. 거기다가 肇慶 사람들은 선교소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11층탑과 선교사들과의 관계에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63] <中國誌> 160-162.

사실 王泮僊花寺라고 적어 준 선교소 편액은 이런 의심을 뒷받침해 주는 것이었다. , 선교소에 일반의 자유로운 출입을 막은 것도 불만의 원인이 되었다. ‘라고 이름 붙은 장소가 주민들에게 유원지 역할을 거부한 것은 중국사회의 관습으로 보아 불만스러웠을 것이 당연하다. 주민과의 갈등 이유에 대한 리치의 일방적 서술에 균형을 잡기 위해 비록 리치가 서양어로 번역했던 것을 재번역한 것이지만 廣州 長老들의 고발 내용을 참고로 싣는다.

 

어떤 사람이든지 公益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을 경우 윗사람들에게 이를 알리는 것이 이 나라 법으로 허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 廣州 長老들은 이 지방 察院인 각하에게 우리가 본 바 잘못된 일들을 알려드림으로써 각하의 처리에 의해 잘못이 바로잡아지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첫째로 알려드릴 일은 肇慶 府城에 지금 살고 있는 외국인들이 우리 중국에 자리 잡기 위해 외방으로부터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겉으로 나타난 것과 다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의심할 중대한 이유가 있으니, 이 나라에 큰 불행이 닥칠 것을 염려합니다.

이에 대한 증거는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만으로도 명백히 드러나 있습니다. 域外의 야만국에서 온 蠻人들이 香山縣의 마카오에 수없이 몰려와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우리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려 하고 있으니, 이를 기화로 이 나라에 들어올 길을 만들어 우리 백성들과 무역을 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런 절차를 아직 신청하지도 않았고 사절을 보내지도 않았지만, 마카오 주변을 마구 돌아다니고 있고 지난 몇 해 동안에는 내지로 들어와 주민들과 교역함으로써 외국인의 출입에 대한 禁令을 짓밟아 왔습니다. 年例交易期가 끝나면 돛을 올려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근래에는 이층집들까지 지어 놓고 개미떼, 벌떼처럼 모여들고 있습니다.

백성으로 이런 일을 알고 있으면서 그 생각을 하며 머리털이 뻗치고 가슴이 떨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더욱이 저네들은 속임수와 잔재주에 능해서 날이면 날마다 새로운 짓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들은 肇慶으로 스며들어가고 더 많은 자들, 배편으로 왕래하는 사악한 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탑을 세웠습니다.

진정, 그들이 우리의 비밀을 엿보기 위해 외국에서 온 첩자라 의심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백성들과 많이 접촉하고 있으면 그 중에 천성적으로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자들을 유혹해서 마치 고기떼를 끌고 가듯 먼 바다로 끌고 나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야말로 국가적인 재앙이 될 것이니 좋은 밭에 가시나무를 심고 방 안에 늑대를 끌어들이는격이 아니겠습니까?

마카오의 위태한 상황은 손발에 난 종기와 같아서 시간을 들여 치료하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에 있는 肇慶의 문제는 폐와 심장을 억누르는 종양과 같은 것이어서 즉각 손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이치입니다. 肇慶 知府에게 저 외국인들을 즉각 추방하도록 각하께서 명령을 내려주십사고 탄원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들을 일단 마카오에 돌아가게 하고, 시간이 지난 후 적당한 때를 보아 마카오의 위협도 제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하께서 이렇게 해 주신다면 우리 의 백성이 모두 살게 될 것이고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없을 것입니다.”[64]

[64] <中國誌> 195-197.

 

결국 선교사들은 1589년 여름에 肇慶에서 추방되었다. 신임 총독 劉繼文肇慶에 부임하기 전부터 선교사들을 축출하도록 명령한 동기를 리치는 선교소의 건물을 뺏기 위한 욕심으로 설명해 놓았지만, 이것은 악의적인 비방이다. 그는 선교사들을 韶州 南華寺에 옮겨서 살도록 명령했는데, 그동안 肇慶에서 몇 차례 선교사들로 인한 소동이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선교사들의 공식적인 거주 이유에 적합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5] 총독의 판결문 내용을 리치는 이렇게 기록했다:

[65] <中國誌> 206. 선교사들의 거주 이유는 상인들의 소란한 왕래와 세속의 번잡을 떠나 예배에 생활을 바치려 한다王泮에게 진술한 바 있다. (같은 책 147.)

 

비록 利瑪竇가 흉악한 목적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관계된 조사를 통해 이곳에서 아무런 법률을 위반한 일도 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가 자기 조국을 완전히 등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종교생활이란 어느 곳에서나 영위할 수가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에 외국인들이 너무 오래 머무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를 자기 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일은 부당한 일도, 가혹한 일도 아닐 것이다. 사원 짓는 데 든 돈이 적지 않았을 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그 돈은 布施로 들어온 것이니 원래부터 그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66]

[66] <中國誌> 211.

 

리치 자신은 이주 명령에 따를 생각이었으나 마카오에서 보고를 받은 발리냐노가 절대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고, 부득이하면 차라리 중국을 포기하고 나오라, 다른 곳에도 선교사가 필요한 곳은 얼마든지 있다, 하고 극한투쟁을 지시했다고 리치는 기록했다.[67] 중국 선교에 오랫동안 정성을 들여 온 발니냐노의 지침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다. 이 지침으로 인해 중국 선교가 거의 괴멸에까지 이른 데 대한 책임관계로 왜곡된 내용을 적은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肇慶과 마카오 사이의 통신 문제로 무언가 잘못된 일이었는지 판단을 도울 다른 자료가 없었다.[68]

[67] <中國誌> 206-207.

[68] 이 무렵 리치가 쓴 편지로 남아 있는 것은 韶州에 도착한 후 발리냐노에게 보낸 두 통이 있으나 肇慶을 떠난 경위에 대한 언급은 없다. J Schutte,(Tr. by J Coyne) Valignano's Mission Principles for Japan. (2 Parts, St Louis, 1980-83): 415에 의하면 발리냐노가 예수회 총장에게 15896, 7월 간에 쓴 편지 몇 통이 바티칸에 소장되어 있는데(문서번호 205-209) 검토할 필요가 있을 듯하나 손이 미치지 못했다. 이 때 루지에리가 마카오에 나와 있었는데, 肇慶의 사태 악화에 책임이 컸던 그가 상황을 잘못 전달했을 개연성도 상정할 수 있다.

肇慶을 떠나라는 명령에 강경하게 저항한 결과 마카오로 축출당하는 최악의 사태에 이르렀다. 리치 일행이 廣州까지 나왔을 때 총독이 다시 불러서 마지막 절충 끝에 로 향하게 된다.[69] 이 경위에 대한 리치의 기술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으나 전체적 윤곽으로 볼 때, 기왕 거주를 허가받고 있던 외국인을 굳이 국외로 추방하지는 않더라도 그 공식적 거주 이유(조용한 종교생활)에 적합하면서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적은 곳으로 보내려는 총독의 뜻이 관철된 것으로 대략 이해된다. 아무튼 선교사들에게는 이로써 정착의 첫 단계가 마무리된 셈이고, 韶州로 옮긴 뒤로는 그 활동범위와 방식에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69] <中國誌> 208-221.

이때 루지에리가 중국 현장에서 물러났다. 리치보다 앞서서 중국 선교에 투입되었던 루지에리는 끝내 리치만큼 현지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선교소 증설 목적으로 浙江省廣西省에 여행을 했지만, 두 번 다 해로운 결과만 가져왔다. 그는 결국 1588년 초 마카오에 다니러 간 길에 선교단장 산데의 결정으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발리냐노의 도착 후 유럽으로 송환되어 선교현장에서 은퇴했다.[70]

[70] 발리냐노가 교황으로부터 중국 황제에게 사절을 보내도록 주선하는 임무를 루지에리에게 맡겼다고 하지만, 정황으로 보아 루지에리가 중국 선교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결과인 것 같다: <中國誌> 190, 193-194.

그 동안 중국선교단에는 리치와 루지에리 외에 선교단장 산데(Duarte de Sande 孟三德, 1547-99)를 비롯, 알메이다(Antonio de Almeida 麥安當, 1557-91)와 페트리스(Francesco de Petris 石方西, 1562-93)가 임명되어 있었다. 그러나 중국 관헌이 처음 들어온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의 거주를 허가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산데와 알메이다가 잠깐씩 들어갔다가 형편이 여의치 않아 되돌아 나오고, 페트리스는 肇慶에 가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肇慶에 단 하나의 선교소만이 있을 때는 활동의 폭에 제약이 심할 뿐 아니라 중국 선교의 운명이 한 가닥 실오라기에 달려 있는 것처럼 불안한 실정이었다. 그런 때문에 선교사들은 다른 지역으로 여행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교소 증설 가능성을 알아보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루지에리가 浙江省으로 여행할 기회가 생겼을 때 리치는 이렇게 적었다: “이것(여행의 기회)이야말로 우리가 기다려 마지않고 있던 것이다. 순찰사는 가능한대로 새 선교소를 열도록 지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더 많은 우리 선교사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서 선교소 하나를 부득이 폐쇄하는 일이 있더라도 선교사업 전체가 끝장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중국 안에 교두보 하나를 마련한 것도 오랜 동안에 걸친 노력의 결실이었는데, 만일 그런 일을 되풀이해야 할 경우가 생긴다면 아마 먼저보다도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71]

[71] <中國誌> 177.

결국 총독의 부임을 계기로 가장 두려워하던 사태가 닥쳤다. 肇慶 선교소를 지키기 위해 리치를 앞세운 선교단은 필사의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肇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신 보다 내륙에 위치한 韶州에 새 터를 잡게 된 것은 전화위복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6년간 집착하고 있던 틀을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것이기 때문이다.

부득이하게 肇慶을 떠날 경우 리치가 제일 옮기고 싶어 한 곳은 南雄이었다. 아직도 兩廣 총독의 허가에 매달려 있어서 廣東省을 벗어날 수 없는 입장에서는 江西省으로 넘어가는 길목 끝에 있는 南雄이 장차 廣東省 밖으로 활동을 넓힐 거점으로 적합하게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총독이 권유한 南華寺에 가까운 韶州佐使肇慶 知府에게 소개받아 좋은 관계를 맺고, 총독의 권유에서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벗어나는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72]

[72] <中國誌> 220-225.

韶州肇慶보다 내륙에 위치한 때문에 포르투갈인의 활동 확대에 대한 주민들의 경계심이 적었다. 그리고 兩廣 행정의 중심지 肇慶에 비해 선교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관리들의 수도 적고 상대하기가 쉬웠다. 또 루지에리를 대신한 알메이다가 전임자보다는 차분하게 한 몫을 한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韶州에서의 활동을 향상시킨 중요한 조건은 앞 단계에서의 경험을 통해 선교사들의 적응력이 강화되고 그 동안의 준비를 통해 더 적극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이었다.

肇慶 시절(1583-89) 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가 王泮이었다면, 韶州 시절(1589-95)의 가장 중요한 친구는 瞿太素였다. 瞿太素江蘇省 蘇州의 명문 출신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73] 일찍이 연금술로 가산을 탕진한 뒤에는 가문의 명성을 팔아먹으며 강호를 주유하다가 마카오의 포르투갈인이 수은으로 은을 만드는 연금술을 가졌다는 소문에 이끌려 선교사들에게 접근하게 되었다.[74]

[73] 리치의 설명에 따르면 瞿太素瞿景淳(1507-69)의 아들이었던 듯하다. <中國誌> 230: “그의 아버지는 높은 관직 때문에도 잘 알려진 사람이지만, 그보다도 進士를 뽑는 시험(會試)에서 장원을 한 것으로 더 유명하다. 그의 아들은 집안의 천재였고, 공부를 계속했더라면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가르침을 벗어나서” <明人傳記資料索引>에 의하면 瞿景淳嘉靖 23(1544) 會試第一, 이어서 殿試第二를 하였으며, 관직은 禮部左侍郞兼翰林院學士에 이르고 文懿公諡號를 받았다. 瞿太素의 이름은 <交友論> 序文汝夔로 나와 있지만, 이 논문에서 그의 이름만은 본명 대신 太素라는 雅號를 썼다.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제외한 그의 행적이 전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74] <中國誌> 230-231. 포르투갈인이 중국에서 수은을 거두어 반출하고, 들어오는 배에는 은을 많이 싣고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소문이 났던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억측이 사실에 상당히 근접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16세기 후반 수은을 이용해서 은 광산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술이 독일에서 개발되어 포르투갈인이 가져간 중국 수은의 상당량이 멕시코와 페루에서 이런 용도에 쓰였던 것이다: Spence: 186.

韶州의 선교사들이 그런 재주를 가졌을 리는 만무하니 瞿太素에게는 실망이었겠지만, 그는 선교사들과의 관계를 계속할만한 다른 흥미 있는 측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측면들 가운데 리치가 가장 중점을 두어서 기록한 것은 그의 지적 탐구심이었다. 리치는 제자 노릇을 자청하는 에게 수학을 포함한 서양 학술을 가르쳐 보고 그 학습능력과 열성에 찬탄해 마지않았다.[75] 중국 일류 지식인과 학술을 매개로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이 경험은 앞으로 리치가 기독교와 서양 학술을 중국 지식인들에게 소개해 나가는 작업의 출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75] <中國誌> 231-232.

瞿太素는 비록 퇴폐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교유의 범위가 넓고 재간이 좋은 사람이어서 리치의 명성, 특히 수학자로서의 명성을 넓히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리치에게 제자로서의 를 취하고 축첩 문제만 아니라면 세례를 바랄만큼 신앙을 받아들였다고[76] 하지만, 일방적 희망이었던 것 같다. 뒤에(1605) 가 입교를 하기는 하지만 그 정황에는 특이한 면이 있었으며, 다음 절에서 다룰 것이다.

[76] <中國誌> 231-232.

韶州에 있는 동안에도 주민들과 심각한 분쟁을 겪었는데, 입교자들의 우상파괴행태가 주민의 반감을 일으킨 때문이었다. 리치의 기록에 의하면 분쟁의 실마리가 된 것은 1591년의 신년 축제 때 리치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聖像 하나를 제단 위에 설치한 일이었다고 한다. 리치는 이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자 사방으로부터 이 聖像을 우러러보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인근에 사는 사람들은 이 축제에 당하여 이런 마음을 이렇게 드러내는 데 대해 아주 못마땅해 했다[77]고만 기록해 놓아서 정확한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77] <中國誌> 236.

입교자들의 우상파괴를 방조 내지 사주해 온 것으로 주변에 비쳤을 선교소에서 자기네 우상을 자랑스레 내어놓은 것이 누적된 반감을 폭발시켰을 것 같다.[78] 애초에 분쟁 내용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돌팔매질이 있었고 쫓아나간 선교소 사람들과의 사이에 약간의 드잡이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문제의 처리에 瞿太素가 너무나 뛰어난 수완을 보이는 바람에 일이 그만 커져 버렸다.

[78] <中國誌> 247-248: 선교소에 입교자들을 살게 한 것은 숙식을 빌미로 해서 의탁할 데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빈 절과 사당을 습격해서 우상을 파괴하는 데 열심이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이를 말렸다고 기록해 놓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말린 것 같지도 않고, 결국 우상파괴 행위는 선교사들이 원한 데 연유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변 주민들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리치의 기록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이 일을 조용히 넘기려 하였으나 瞿太素가 이번에 본때를 보이지 않으면 끝없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해서 그의 주선에 따라 知府에게 고발을 하였다고 한다. 知府는 이 고발을 전폭 존중해서 선교소 하인들이 채포해 온 주민들을 엄벌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다가 선교사들이 용서를 청함에 마지못해 풀어주었다고 한다.[79]

[79] <中國誌> 236-268.

리치 자신의 기록을 보더라도 瞿太素의 수완을 통해서든, 예물을 써서든 知府의 뜻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를 이용해서 주민들을 위압하려 한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순찰대원들이 체포를 꺼려한 정황으로 보아 문제된 사람들이 고을 유지들 내지 흠 없는 양민들이지, 불량배들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히려 둘이 나가서 젊은이 둘을 체포해 넘겼다는 선교소 하인들이 드잡이질에 더 능숙했던 것 같다.

이 사태에서는 선교소가 압승을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감이 더욱 심화되었을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그리고 선교소 측의 방자한 행태도 더 격화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이듬해 여름에는 훨씬 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15927월 어느 날 밤, 부근에서 결혼식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선교소에 강도가 침입했다고 리치는 기록했다. 하인 두엇이 크게 다치고 신부들(리치와 페트리스)도 조금씩 다쳤는데, 아무리 소리쳐 도움을 청해도 인근 주민들이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강도들은 아무것도 훔쳐가지 않았다. 고발을 받은 知府는 인근 주민들을 조사하여 전 해 사건에 끼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범인들을 색출해서 강도죄로 중형을 선고했고, 이 사건의 覆審 때문에 선교사들도 증인으로 肇慶까지 불려다니게 되었다.[80]

[80] <中國誌> 248-250.

강도란 얼토당토않은 말이다. 지난 해 사건의 억울한 결말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이 선교소 부근의 결혼식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음은 행간까지 읽지 않더라도 명백한 일이다. ‘야간 주거침입정도의 공격에 최대한으로 보복하기 위해 강도죄를 덮어씌운 것인데, 그 결과가 엄청나게 되었다. 전번처럼 처벌 위협에 끝나지 않고 주동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기에 이르렀으니, 화해도 불가능하게 되었고 일이 韶州 고을 안에서만 끝날 수도 없게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1년 넘게 여러 차례 覆審을 거친 끝에 都察御使의 최종심에서 강도죄 아닌 소요죄 정도로 판결받아 범인들이 笞刑을 받고 풀려나온다. 이런 가벼운 판결이 나오기 위해 선교사들이 얼마나 자비심을 가지고 애썼는데 배은망덕한 범인의 친지들이 끝까지 선교사들을 모해, 축출하려 든 것을 리치는 개탄했지만, 그 자신이 기록한 경위를 보더라도 이 사건의 과정을 통해 일반 주민들의 선교소에 대한 감정이 좋아질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81]

[81] <中國誌> 252-254.

선교사들이 처음 활동한 肇慶의 선교소는 이미 폐쇄되었거니와, 그 다음 활동장소인 韶州의 선교소도 십여 년 후에 폐쇄의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은 廣東省에서 선교사들의 적응수준이 아직 미숙했던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그 미숙성이 가장 뚜렷이 드러난 것이 주민들과의 관계를 통해서였으며, 리치가 韶州를 떠난 뒤로는 西士로서 새로운 적응수준에 도달, 이런 문제를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