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모델을 정치에 활용하는 것이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이나 쉽지 않은 까닭은 공적 조직과 사적 조직의 목적이 서로 다르다는 데 있다. 기업의 1차 목적이 이윤의 극대화에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기업가는 없다. 장기적 기준이냐 단기적 기준이냐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리더라도, 기업의 궁극적 목적이 이익에 있다는 사실을 기업가는 잠시도 잊을 수 없다.

반면 정부의 목적은 그렇게 명쾌하지 않다. 어느 학파의 정치사상가도 정부의 임무가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데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는 어떤 행동이 필요한가? 안전을 보장한다? 빈곤을 퇴치한다? 인권을 보호한다? 행복을 증진한다? 불평등을 해소한다? 사회조화를 증진한다? 역사와 문화를 보존한다? 이런 것들을 적당히 섞는다? (...)

기업과 정부의 목적이 서로 다른 만큼 그 지도자가 필요로 하는 특성도 서로 다르다. 기업에서는 관계자의 역할이 비교적 분명하다. 소유주와 피고용자다. 정부에서는 관계자의 역할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지도자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인가?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받는 모두? 영토 내의 사람들? 미래 세대? 조상들? 이 모두를 배려한다면 그 비중은 어떻게 하나? 사람들이 원하는 재화의 분배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그 값은 누가 치르나? 지도자 자신의 견해가 어떤 것이든, 그는 여러 종류 관계자들의 요구에 따라 자기 견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정부 관리는 서로 어긋나기 쉬운 여러 가지 목소리를 열심히 듣고 그에 호응해서 서로 다른 목적들, 가치들, 이해관계들을 절충시키며 자기 목표를 빚어 나가야 한다.

기업 지도자도 여러 사람의 견해를 융합할 필요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노선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뿐이다. 잭 웰치 같은 경영자는 비판하라, 망신 주라, 조롱하라, 모욕하라!” 같은 지침을 채용할 수 있어도 정치계처럼 일이 되도록 하기 위해 협력과 칭찬과 전략적 모호성을 활용하는 동네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한 현대사회의 정치지도자는 여러 방면의 평가와 비판에 노출되는 반면 기업 지도자에게는 공적 감시의 필요가 적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지도자는 사회의 여러 부문으로부터의 비판에 열린 자세를 취할 필요가 있다. (...)

그리고 개혁의 필요성이 기업 쪽에 더 절박하다. “너 죽고 나 살기식의 자본주의세계에서 기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개혁을 안 할 수 없다. 정부에게는 개혁이 절대 우선순위를 가질 필요가 없다. 개혁을 좀 덜 한다 해서 정부가 퇴출되기는 어렵지 않은가.

또 하나 중요한 차이는 기업 지도자들은 기업이 활동하는 사회의 복리를 어느 정도 이상 걱정할 필요도 없고 전통과 역사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다는 점에 있다. 사회적 책임이 기업 경영에서 한 가지 고려사항이기는 하지만 이윤 추구라는 핵심 목적에 앞설 수는 없다. 대다수 기업에서 이윤 추구와 사회적 책임의 두 가지 기능이 명확히 구분되어 별도로 운영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뿐 아니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 기능도 가능한 한 이윤 극대화의 목적에 맞춰 운영되는 것이 보통이다. 금융회사가 기업 인지도 제고를 위해 스포츠행사를 주최한다든가 채광회사가 자원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외진 지역의 사회 인프라 건설에 투자하는 것이 그런 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그 상업적 이익에 꼭 맞춰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의 이익과 사회 전체의 이익이 정면으로 충돌할 때는 기업의 이익이 관철된다. 금융회사가 이자를 올리거나 내려서 사회에 손해를 끼치되 회사의 이익을 늘릴 수 있다면 주저하는 경영자가 없을 것이다. 사회의 피해를 막는 것은 정부의 할 일이지 기업의 할 일이 아니다. 사업장을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회사를 외국 기업에 합병시키는 것이 수지맞는 길이라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사회 전체의 득실이 기업의 수익성에 영향을 끼치는 한도 내에서 기업 지도자가 관심을 갖겠지만, 그 한도를 넘어 애국심이나 사회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할 일이 아니다.

그러니 큰 회사의 최고경영자로 외국인을 앉히는 것이 일본처럼 폐쇄성으로 소문난 나라에서도 흔한 일이 되었다. 정치공동체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어떤 통치 구조를 가진 나라에서든 지도자는 그 공동체 출신이어야 한다. 옛날에는 식민지 총독을 지배국가에서 보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정치지도자가 그 정치공동체의 충성스러운 일원이어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필요조건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