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적인 문제는 유권자들의 이기심이 아니라 무지에 있다. 현명한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에 충분한 지식을 확보하는 유권자가 많지 않다.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투표하려는 사람들도 어떻게 하는 것이 그 목적에 부합한 것인지 제대로 판단하기 힘들다.

무엇보다, 정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적다. 고대 아테네에 비해 이 점에서 지금 상황이 나쁘다는 사실을 白彤東은 이렇게 지적했다.

 

노예노동 덕분에 아테네 시민들은 일상적 노동에서 벗어나 정치에 모든 힘을 기울여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파네스 같은 사람들은 시민들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현대 민주국가의 일반인들이 생활수준 유지를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이것은 자본주의체제만이 아니라 노예제도라는 편안한 죄악을 벗어던진 어느 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자유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의 바람직한 시행을 뒷받침할 만큼의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정치에 참여할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시간의 부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 비해 오늘날의 민주국가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 개인의 투표가 결과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치에 관심 끄고 그 시간에 다른 일 하는 편이 합리적 선택이 될 수 있다. 제이슨 브레넌은 이렇게 말했다.

 

시민들은 합리적으로 무지하다. 개개인은 정치에 대해 거의 아무런 영향력이 없고 한 표 한 표가 가진 기대효용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정치에 대한 지식이 유권자에게 거의 아무런 가치를 갖지 않는다. 지식의 획득에는 노력과 비용이 든다. 내 한 표가 얼마간의 결정력을 가진다고 생각하면 노력과 비용을 투자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력이 거의 없다는 생각을 가진다면 아예 신경을 쓰지 않기로 결정할 것이다.

 

요컨대 현대 민주국가의 유권자들에게는 정치적 역량을 향상시킬 시간도 동기도 없는 것이다. (...)

투표자의 무지가 민주주의에 본질적인 장애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투표란 모든 사람이 정치적 결정에 동등한 영향력을 갖게 해주는 공정한 과정일 뿐이며, 민주적 결정이 꼭 진실과 정의의 특정한 기준을 지킬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 그 자체에는 민주주의를 옹호할 큰 힘이 없다. 데이비드 에스틀런드는 말했다. “참으로 공정한 민주적 절차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결정의 권위와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도덕적 의미는 너무 작다. 절차의 공정성만으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민주적 제도들의 대부분 특성을 설명할 수 없다. 내 주장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동전 던지기보다 공정한 절차가 어디 있겠는가? 법률이나 정책을 무작위로 선택하더라도 공정성은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요컨대 우리가 투표의 절차에 의미를 두는 것은 공정성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투표자의 무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집단지성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처음 제기한 이 개념은 작은 집단보다 큰 집단이 더 많은 지혜와 덕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각 개인의 지식이 아무리 불완전하더라도 많은 사람의 견해가 합쳐지면 어떤 형태의 집단지성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에는 증거도 없지 않다. 잘 알려진 경제 전망치를 모아 평균을 내기만 하면 개별 전망치보다 훨씬 더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균에 들어갈 개별 정보가 상당 수준 지식의 뒷받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효과가 일어날 수 없다(...) 정치에는 잘못된 생각을 얼버무려 주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브레넌이 이렇게 말했다. “체계적인 편견을 가진 군중은 예측을 잘할 수 없다. (...) 정확한 예측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집단 내 각 개인의 예측 증력을 향상시키는 것 못지않게 집단 내 인식 경로의 다양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집단지성의 작동을 위해서는 집단의 구성원들이 터무니없는 생각을 갖지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의 유권자들을 놓고는 이 점을 장담할 수 없다.

투표자의 무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가장 강력한 이유는 선출되는 정치인들이 투표자처럼 무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투표자들이 비록 정치제도나 정책에 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잘 이끌어 나가기에 충분한 능력과 경험을 가진 지도자를 알아볼 판단력이다. 설령 정치인들이 선거 중에는 유권자들의 불합리한 요구에 영합하더라도, 당선된 뒤에는 비현실적이거나 부도덕한 것이 분명한 공약들을 예사로 뒤집는다. (...)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투표자의 불합리성을 이런 식으로 견제하는 것으로는 나쁜 정책을 방비하기에 충분치 못하다.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보면 정치인들에게는 유권자들의 요구를 무엇이든 그대로 따르려는 경향이 있고, 그 결과 사회는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법률을 갖게 되고, 불필요한 전쟁을 치러야 하며, 질 좋은 일자리는 줄어들고, 범죄와 환경오염이 늘어나는 반면 복지 수준은 떨어지게 된다.”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사회에서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기 쉽다. 혐오와 불신이 넘치는 사회에서는 다수 집단이 민주적 방법을 통해 소수 집단들을 억압하려 드는 일이 많다. 중국의 민주화에 대한 비관론자들이 이 점을 특히 걱정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방주의나 소수자 인권 등이 헌법상 확립되어 있는 성숙된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민족 간 갈등이 완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치를 재앙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여러 가지 비합리성에 대한 대비책은 너무나 빈약하다. CFO(최고재무책임자)의 행태에 관한 어느 연구에 따르면 2007-2008 경제위기 이전의 S&P 지수를 가장 확실히 믿고 낙관적이던 사람들이 자기네 회사의 전망에 대해서도 과신과 낙관의 경향을 보이면서 다른 회사보다 더 많은 리스크를 떠안았다. 카니먼은 말했다. “낙관주의는 사회에서나 시장에서나 좋은 대접을 받는다. 사람들도 회사들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보다 위험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을 더 잘 대우해 준다.”

유감스럽게도 정치인이나 규제 담당자들도 마찬가지로 낙관주의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적어도 재계 사람들의 낙관주의를 견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캘리포니아 유권자들은 세율을 낮추고 공공지출을 늘리는 투표를 거듭한 결과 공공부채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고등교육보다 교도소 운영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결과를 맞았다. 재산세를 동결시킴으로써 지방자치단체의 주된 세입 근거를 옥죈 1979년의 제13호 주민발의에 따라 주 헌법이 불합리한 개정을 겪은 결과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