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머니들의 구수한 사투리에 귀를 기우리다 보면 윤끼가 번지르르 흐르는 통영 갓 속에 상투가 너부죽이 버티었고 미투리 감발에 행전을 잡순 한 世紀 묵은 화상들이 정감록 풀이가 한창이다.

 

[충청도에 와서 정감록 이야기를 들으니 젊은 나이에 지나치게 정감록을 좋아하던 K의 일이 문득 머리속에 떠올은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이 한마루턱에 이르렀을 무렵 고향인 경상도를 떠나서 徵用도 피할 겸 피란처를 찾아 충청도엘 왔다가 다시 十勝十光之地를 찾아 太白山 밑의 두메산골로 찾아들어가더니 日帝의 도륙은 그럭저럭 면했으나 이즈음은 밤과 낮으로 바꼬이는 ........ 두 나라의 백성 노릇을 하누라, 고래싸움에 부대끼는 새우가 되어서, 그러한 곡경을 그는 또 정감록의 어느 대문을 무어라 풀이해서 그럴사하게 牽强附會하고 있는지 궁금한 일이다.]

 

차창 밖에 움직이는 풍경은 이제 秋收가 한창이다. 볏단을 묶어서 나란이 세워놓은 논뚝이 줄다름을 치는가 하면 무 배추의 파-란 언저리만 남겨놓고 보리갈이에 바쁜 엄마소의 젖을 찾아 밭이랑을 딸아가는 송아지의 작난처럼 생긴 꼬랑지가 가을 해볓을 히롱하는 것이 보인다. 저편 언덕 비탈진 목화밭엔 동화 속에서나 나옴직한 호호백발 할머니가 한평생 목화만 따고 계신 듯 굽은 허리에 기차의 요란스런 고동소리도 들리지 않을 법한데 밭뚝에서 한 손꾸락을 입에 물고 할머니의 일손이 끝나기만 기대린 듯한 소녀의 옥색 저고리가 두 손을 들고 우리들의 기차를 향하여 만세를 불으는 모양이다.

 

[언제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콩나물처럼 분빈 차깐에는 만주서 돌아왔다는 유식꾼을 에워싸고 이야기의 꽃이 피었다. 만주의 八路軍이며 북조선의 土地改革 등 농민들의 흥미를 돋구는 이야기가 끝나고 그 유식꾼은 우리 조선사람들도 너무 쌀만 편식하지 말고 감자며 옥수수 같은 값싸고 영양분 많은 雜食을 먹도록 해야 된다는 것이며 그럼에는 음식의 요리법 같은 것도 옛 습관만을 굳이 지킬 것이 아니라 새로운 궁리를 함이 좋겠다는 것이며 또 有限한 농토에 많은 백성을 길르기 위하여선 농사도 좀 더 集約的으로 규모있게 지을 궁리가 있어야 하리라는 것이며 들을 만한 말이 많다. 저이가 이러한 자리에서 입으로만 선전함에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 몸소 실천해 주었으면 좋으리라 생각되었다.]

 

낮때가 지나서 청주에 내리었다. 輿地勝覽에 보면 하고 젊은 사학도의 淸州에 관한 史論이 한창이다. 듣고 보니 모처럼 이런 길을 떠나면서 輿地勝覽도 들쳐보지 않고 나온 나의 덩둘함이 다시금 곱색여진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와서 마음에 접히는 것은 청주의 역사보다도 K군의 역사이다. 이곳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내가 숨어 살던 시골에 일자리를 찾아온 그는 문학을 공부하고 참을 찾으려 하며 히망을 품은 청년이었다. 그리던 그가 日帝의 채찍 아래 兵丁으로 몰려서 남양으로 끌려간 지 두어 해, 이 都市의 변주리 한길보다 낮은 오막사리에서 외동아들의 생사를 몰라서 눈이 진물던 그 늙은 어머니, 그러나 解放이 되어서 돌아온 아들은 몹쓸 병을 옮아 와서 생명보다도 더 귀한 히망을 잃어버리었다더니 그 가엾은 母子는 지금 이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슬픈 역사를 쌓고 있는가.

 

도청에 가서 C 노인[崔在益]을 맞났다. 아이들처럼 반겨서 두 손을 덤석 잡는 이 다정스런 老人은 어쩐지 局長室의 으리으리함에 걸맛지 안는 것 같아 보인다. 고향에 가서 농사나 짓고 余生을 보내시라 권하고 싶다. 그와 나와는 비록 老少가 다르나 燕岩集이 맺어준 깊은 정분이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계통의 職場에서 일 보던 日帝 때의 일이었다. 볼일이 있어서 상급기관에 나갔을 때 헙수록한 한 노인이 그리 중요치 않은 포스트에서 燕岩集을 펼치고 앉아 있음을 보았다. 그뿐, 우리는 피차에 인사도 없었다. 그 후 오래지 않아 그가 볼일이 있어서 내 있는 곳에 왔을 때 그는 내 책상머리에 꽂힌 燕岩集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뿐, 우리들은 그 때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그리든 것이 解放 卽後 丹陽의 여관에서 우연히 하로밤을 같이 묵게 되어 우리들은 비로소 함께 燕岩을 이야기하고 十年知己나 다름없이 되었었다. 그 후 사년 만에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청주서 학무국의 튜럭을 얻어 탔을 때는 이미 햇볓이 서천에 기운 때였다. 아직도 나무가 듬성드뭇하게 남아있는 산들과 낙엽진 남ㄱ에 붉은 감이 오손도손하니 달려있는 마을들을 지나서 三年山성을 내어다볼 때는 어둡사리가 낄 무렵이었다. 三國史記ㄴ가 어딘가서 귀담아 들은 아담스런 그 이름을 늦은 가을의 저녁놀이 불타는 듯한 단풍잎에 비끼는 이 순간 달리는 튜럭 위에서 바라보매 천년 역사가 취중의 꿈보다도 더욱 아른하다.

 

그것이 신라의 것이던 아니던 좋다. 또한 백제를 막으려 한 것이던 고구려를 막으려 한 것이던 관계없는 것이다. 起重機도 운반차도 없었을 그 옛날 저 높은 산 위에 저렇듯 굵은 돌을 날러다 그 넓은 성을 쌓기란 얼마나 벅찬 일이었을까. 그들은 지배자의 채찍에 울면서 움직였을 것인가. 또는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서로의 운명을 쌓아올린다는 자각 속에서 움직였을 것인가. 얼마나 많은 한숨이 저 돌과 같이 쌓이고 얼마나 많은 원한이 저 성과 함께 굳어졌을까.

 

어둑어둑할 무렵에 保恩에 닿았다. 적으나마 아담스런 산간의 고을이다. 감이 유난스리 많다. 큼직큼직한 것이 모양도 좋고 씨도 없고 값도 싸다. 들으매 대초도 좋은 것이 많이 난다 한다. 시장엔 보이지 않으나 마을 옆 비탈진 곳 같은 데 대초남ㄱ이 많긴 하다. 그러나 이 지방의 特産物을 적은 옛날 책에는 송이(松茸)라던가 꿀, 잣 같은 것만 말하고 감이니 준시니 대초니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보아하매 감이나 대초나 모두 하로이틀에 갑자기 늘어난 것이 아닐성 싶은데 너무 지천으로 흔해서 특산으로 여겨지지 않음일까. 또는 송이니 꿀이니 잣이니 하는 것은 감이나 대초보다도 더 많이 남을 의미함일까. 하여튼 味覺을 돋우는 고을이다.

 

保恩서 俗離山 가는 산길 사십리는 왼통 달밤에 달렸다. 밤이 되니 튜럭이 받아넘기는 늦가을 바람이 볼에 스치어 차거웁긴 하나 어둠침침한 산모롱이 빽빽이 들어선 소나무가지 사이를 비끼는 달빛이 미상불 버리기 어려운 운치이다.

 

얼마쯤 갔는지 산마루턱의 강파른 고개길에 다달았다. 꼬부랑할머니의 이야기에 나오는 그대로인 급카-브를 육중한 튜럭이 토파올으기가 힘들어서 뒷걸음질을 하다 멈치어선 가쁜 숨을 내쉰다. 조곰만 더 물러나면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죽엄의 입을 버리고 우리를 기대리는 것 같아서 아슬아슬하니 손에 땀이 베일 지경이다.

 

마침내 모두들 내려서 걸어올라가기로 하였다. 어디서인지 들국화의 가냘푼 향기가 비를 먹음은 듯한 축축한 바람을 타고 그윽히 풍기어 온다. 그늘진 숲사이길로 청승마진 부헝이의 우름소리라도 들리어올 그러한 달밤이언만 크낙한 산덩어리는 어둠이 무서운지 숨죽은 듯 고요하다. 오뺌이는 어느 나무가지에서 이 조용한 가을밤을 反芻하고 있는지.

 

한길은 차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느라고 산허리를 이리저리 감돌았으나 지름길은 다복솔 포기를 다람쥐처럼 타고 올라가면 고개를 위으로 재껴야 바라볼 수 있던 산마루턱이 이내 거긴성 싶다. 마침 보름 가까운 달빛이 다복솔 포기의 밑둥까지 골고루 빛어주어서 우리는 징징거리는 튜럭보다도 먼저 돌무더기 쌓아놓고 색다른 헝겁조각을 버성긴 나무가지에 달아둔 산마루턱에 올라설 수 있었다. 묵은 전설은 번뜨기는 햍라잍이 보기싫어서 도망간 지 이미 오래고 주인을 잃어버린 산마루턱이 이 긴긴 가을밤을 말동무 하나 없이 홀로 새이기가 호젓한 듯 지나가는 길손의 눈에 몹시도 을스녕스리 비쳐진다.

 

고개를 너머서면 곳 절인가 하였더니 法住寺 40里란 礪山 70里 폭이나 되는지 가도가도 달만 휘영청하니 밝을 뿐. 이 차가 혹시 길을 잘못 든 것이나 아닌가 싶을 무렵에 절의 境內인 듯한 곳에 닿았다. 절은 정녕 절이련만 달빛 어린 소나무가지 사이로 은은히 들려오는 장구소리와 유행가소리에 정말 別天地를 찾아온가 싶다.

 

水晶橋 옆에서 차를 내리니 다리는 통나무를 가주 깔아서 아직 흙도 덮지 않았다. 옛날은 다리 위에 門樓를 세우고 수레와 사람이 모두 그 밑을 드나들었다는데 지금은 으리으리한 난간 대신 뗏목처럼 엮은 통남ㄱ에서 풍기는 송진냄새가 새롭다.

 

다리를 건너서니 왼손 편으로 까맣게 우러러보이는 큰 부처님이 서 있다. 보아하매 은진미륵보다도 더 높을성 싶다. 달빛을 받은 그 이마가 하도 넓고 산을 의지한 듯 서 있는 그 키가 하도 슬몃해서 무슨 靈感이라도 드리울 듯 느끼었더니 穀茶를 매우 잘 자시는 이 절 늙은 스님에게서 들으니 근년에 세맨트로 해 세운 것이라 한다. 밝는 날 俗된 그 모습에 幻滅을 느끼느니보다 차라리 이 밤으로 이 절을 떠나고 싶다.

 

(글을 다듬어가며 옮겨 적은 것 같고, 긴 원고의 중간 부분으로 보입니다.)

 

(다른 위치에 앞의 글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보이는 것이 있어 옮겨놓습니다.)

 

俗離山 紀行 二

 

자고 나니 가을 새벽의 山莊의 공기가 그윽한 향기를 품은 듯, 적이 俗離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문을 여니 처럼 생긴 육중한 五層 建築이 아침 문안을 왔음인지 뜰 아래 현신하고 있다. 捌相殿이란 그 이름은 그리 뉴앙스가 좋지 않으나 古典美가 뚝뚝 듯는 듯한 그 모습은 미상불 탐탁스레 보인다. 어느 때 뉘가 이 집을 이룩하였는지, 그런 일에 마음이 써이는 건 史學徒의 잘망구진 根性일 것 같아서 늙은 스님의 정성스런 설명은 일부러 건성으로 듣고 말았으나 어느 분이던 좋은 功德으 쌓았음이 분명하다. 그야 政治季節을 따라 丹靑을 달리하는 부처님쯤이야 구태어 이렇듯 훌륭한 殿閣이 아닐찌라도 모실 수 있을 터이지만 저 층층이 구멍마다 깃들이는 수없이 많은 비둘기는 이 捌相殿이 아니런들 이 서릿발 쓰린 아침을 어느 둥지에서 옹송거리고 지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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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