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149호를 받아보니 글 제목 둘이 눈에 들어온다. "민주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 3년째 "자본주의 이후"를 생각하고 있는 데다가 요즘 <차이나 모델>을 번역하면서 "민주주의"에 관한 생각을 굴리고 있으니 이 제목들이 내 눈에 뛰어들어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김종철 선생의 글 "유일한 대안"을 다 읽을 때까지 의아한 생각이 쌓여가기만 했다. 기후 변화, 기본소득, 노동윤리... 늘 하던 얘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민주주의"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 문단에 가서야 민주주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정치'라는 결론을 여기서 다시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의 어리석은 탐욕에 맞서고, 기후변화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고, 다수 민중의 삶을 보호하고, 자연세계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것은 '합리적인 정치'이다. 그리고 현 단계에서 합리적인 정치란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뿐이다. 민주주의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다.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일이다. '자연' 상태에는 약육강식이든 뭐든 모든 것을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데 끝난다. '당위'가 일어나는 것이 바로 '문명'이고, 당위를 실행하는 과정이 정치 아닌가. 약육강식의 '현상'을 통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정치의 실종"을 탄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정치가 꼭 "합리적인 정치"여야 하는가? 김 선생이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는 "비합리적인 정치"는 어떤 것일까? 민주정치 이외의 정치를 모두 "비합리적인 정치"로 보는 것이라면 나는 동의할 수 없다. 세습 군주제 정치 중에는 '현상의 통제'라는 정치의 기본 목적을 현대 어느 민주주의국가보다 잘 성취한 사례가 많다.

 

김 선생은 민주정치만을 합리적인 정치로 보는 독단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현 단계에서"란 말과 "온전한 의미"란 말을 붙였다. 이 "현 단계"가 누구의 어떤 단계를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온전한 의미"란 어떤 의미인가?

 

내 아래 세대 학인 중 나랑 관심 범위와 관점이 제일 많이 겹치는 이가 이병한 선생이다. 몇 해 전 그를 처음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무슨 얘기 끝에 그가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선생님은 민주주의까지도 상대화해서 보려 하시는군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려고 애는 씁니다. 모든것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단계에 세상이 와 있어요. 하지만 우리 세대는 한계가 있어요. 바로 우리 또래에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엄청난 인간적 희생을 감수한 이들이 있는데, 그분들을 존중하는 마음 때문에 표현만이 아니라 생각에도 절제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선생 세대에서는 바뀔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최근 "자본주의 이후"에 생각을 모으면서 "민주주의 이후"도 생각할 필요를 떠올리고 있다. 근대세계의 모순을 초래하거나 격화시킨 제도와 이념 중에 민주주의도 그 몫이 작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못 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변명을 어디까지 끌고 갈 것인가? "온전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언제 어디서 실현되기나 했었다는 말인가?

 

김종철 선생은 나랑 같은 세대다. 현실의 제 문제에 대한 절실한 비판을 "온전한 의미의 민주정치"에 대한 희망으로 마무리하는 마음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악마로 보고 민주주의를 천사로 보는 우리가 사실은 2인조 사기단에 걸려든 것은 아닌지 한 차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김 선생이 뜬금없이 민주주의를 들고 나온 계기가 그 다음의 글, 그가 번역한 미즈노 가즈오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에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에서도 민주주의는 역사적 현상으로서 바람직한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이 글 중 민주주의를 언급한 대목을 다 뽑아봐도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민주주의적인 근대성'이라는 것은 명분상으로는 "개개인의 재능이나 노력에 근거한 격차가 그 밖의 격차보다 정당화될 수 있다는 신념에 기초해 있다."(20쪽)

 

그 합리성이 형식적이나마 성립된 것은 20세기의 전반뿐이며, 그 기간을 제외하면 근대의 대부분에 걸쳐서 합리성이나 경제적 민주주의는 부정돼왔다.(21쪽)

 

21세기는 자본주의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 될 것이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일본의 성장전략이라는 것은 현재의 틀 안에서 부의 집중을 촉진시키고, 민주주의가 없는 앙시앵레짐 체제로 역사를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다. 성장을 우선하는 근대화 노선은 결국 부의 집중을 초래하고, 앙시앵레짐 체제와 테러의 시대로 국민을 끌고 간다.(27-28쪽)

 

그리고는 글 끝에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종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민주주의뿐이다. 민주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 시장이 폭력을 휘드르게 된다.(29쪽)

 

십여 년 전 한국교회사연구소의 한 세미나에서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에 관한 발표에 이은 토론 중 고 최석우 신부님의 재미있는 말씀이 생각난다. 오붓한 자리였기 때문에 거침없는 의견 발표가 이어지고 있었는데, 두 패로 갈라져 약간 과열의 조짐이 있었다. 한쪽은 교구장이던 분의 행적을 그렇게 가차없이 다뤄도 되냐는 신앙파였고, 또 한쪽은 학문연구에는 성역이 없어야 한다는 과학파였다. 이 논쟁을 최 신부님이 한 마디로 마무리했다.

 

"주교님께서는 조선인의 육신보다 조선인의 영혼을 더 사랑하셨던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가 근대성의 육신이고 민주주의가 근대성의 영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요즘 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