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 않은 아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논평 부탁을 저자에게 받은 책이라는 사실부터 밝힌다. 면식은 없지만 알 만한 분인데, 이 부탁이 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특이한 책의 의미를 포착할 만한 시각을 내가 가졌다고 생각해서 부탁한 것이라는 사실을 책을 받아보자 알아볼 수 있었다.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제목 아래 5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행적을 탐색하는 사적인 내용을 발판으로 하면서도 사적 영역을 넘어서는 탐색을 담았다는 점에서 특이한 책이다. ‘특이한책이라 했지만, 사실은 이런 것이 바로 모범적인 전기(傳記) 작품이다. 대상 인물의 모습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처한 시대상과 사회상을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전기문학의 본령 아닌가.

주인공 김필목(金弼穆, 1923-1966)은 세상에 별 파장을 일으키는 일 없이 조용히 살다가 노모와 처, 그리고 슬하에 3남매를 남기고 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분이다. 이 책에는 고인의 일생 중에서도 1950년대 10년간의 생활과 활동이 집중적으로 그려져 있다.

계룡산 인근의(공주시 중장면 경천리와 논산시 노성면 노성리) 비정규학교 교사로 시작해 경남 통영에서 정규직 교사로 자리 잡고 결혼해서 첫아들로 저자를 얻은 기간이다. 그 이전, 병약한 학생 시절이나 그 이후, 서울에 와 약학대학을 늦게 다니고 동네 약방을 꾸리던 몇 해에 비하면 이 교사 시절이 고인의 소질을 한껏 발휘한 황금시대라 할 수 있다.

저자가 선친의 행적을 탐색하는 작업의 기본 자료는 고인이 남긴 기록과 사진이다. 이 자료를 고인 사후 40여 년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가 2009년 가을 어느 날 비로소 들여다보게 되었고, 4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난 선친의 모습을 50대에 접어든 아들이 되살리는 작업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작업이 두 개의 성과를 낳았다고 나는 본다. 하나는 한 사람의 초상화다. 절세미남도 아니고 일대호걸도 아니지만 많은 독자가 은근한 매력을 느낄 만한 모습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소년기를 지내고, 폐병에 걸려 선대 고향에 가까운 평양에 돌아와 요양하며 기독교인 청년으로 자라났고, 해방 후 서울로 진학해 지내다가 전쟁 중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거쳐 천직이라 할 수 있는 교사직에 나섰지만 그 자리도 오래 지키지 못했던 한 사람이다. 조용한 삶을 바라는 병약한 주인공이 시대의 풍파에 휩쓸려 떠돌아다니면서 사람다운 사람의 자세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독자에게 애잔한 느낌과 숙연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또 하나의 성과는 그 시대의 풍경화다. 나는 1950년대의 풍경에 익숙한 편이다. -소년기의 기억을 가진 위에 근년 현대사 정리 작업을 위해 살펴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통해 그 시대에 대한 이해를 늘릴 수 있었다. 풍경의 구도가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과 정서를 채워줌으로써, 그 시대의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풍경화가 되었다. 마침 막 나온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오월의 봄 펴냄) 3-4권을 읽고 있는 참인데, <아버지를 찾아서>가 나를 그 현장으로 데려가 주었다.

저자가 내게 논평을 부탁한 이유 하나가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에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잃은 아버지의 모습을 늦게야 찾아낸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낄 것이다. 38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일기에 내 나이 38세가 될 무렵 접하면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저자도 응석 대상으로만 기억하던 선친의 모습을 등신대(等身大)로 키워내면서 충격과 감동을 느끼는 대목이 많다. 이 작업의 과정을 통해 선친의 가르침을 새로 얻었을 것을 내 경험에 비추어 알겠다. “고기가 물 고마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던 가까운 관계에서도 눈을 뜨기만 하면 얼마나 큰 가르침을 찾을 수 있는지 독자들도 책을 읽으며 실감할 것이다.

‘1950년대의 풍경화란 측면에도 특별한 가치가 있다. 아버지 일기에 접한 후 타이핑해서 서중석 선생에게 보인 일이 있다. 책으로 낼 생각은 아직 않고, 현대사 연구자들에게 자료로 제공할 길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읽어본 서 선생이 귀중한 자료를 남겨준 김 선생님(내 아버지)께 고맙다고 하기에 그분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이 자료가 살아남은 것 아닐까요?” 했다. 그분이 반공정권 아래 수십 년 더 살아계셨다면 어느 대목에서 스스로 파기하셨을지 모른다. 사람은 가고 일기만 남았기에 어머니가 사람 아끼듯이 일기를 아끼셔서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의 빈약한 기록문화를 한탄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그 큰 원인을 현대사의 질곡에서 찾는다. 요즘도 별 것을 다 갖고 종북몰이를 하지만 독재정권 때는 더했다. 꼬투리 남길 것을 꺼려서 기록할 일이 있어도 기록하지 못하고, 어쩌다 만들어진 기록도 빛을 보지 못하기 쉬웠다. 어머니가 아버지 일기를 넘겨준 것이 1987년 민주화 직후였다.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역사 앞에서>가 책으로 나올 수 있었을지 장담할 수 없다.

1958년생의 저자가 1950년대 풍경을 이만큼 핍진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조건은 고인의 어느 정도 체계적인(수첩 메모 같은 단편적인 것이지만) 기록이 남아있었다는 데 있다. 1940년대까지 고인의 모습은 어머니와 몇몇 주변사람들의 회고를 바탕으로 스케치처럼 그려져 있다. 체계적 기록의(그리고 고인이 찍은 상당량 사진의) 뒷받침을 받는 1950년대에 초점을 맞춘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초상화로서도 흐릿한 배경 위에서 대상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풍경화로서도 1950년대 이해를 위한 좋은 자료가 되었다.

이 세상에 왔다 가는 사람은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법인가 보다.”(451) 마음에 많은 울림을 남기는 저자의 말이다. 그 선친은 세상에 폐를 덜 끼치려고, 흔적을 크게 남기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던 분 같다. 그렇지만 뭔가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남긴 것을 받아내고 살려내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만들어내지만 어버이의 존재는 자식의 손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아버지만 못해유.”(43) 선친의 옛 제자에게 경천학교 시절 얘기를 듣던 중 청하지 않은 이 한 마디 커멘트가 저자의 마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다. 두 분 다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이 말이 맞는 것인지 물론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짐작컨대 저자가 아버지 찾는 작업을 통해 전보다는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려는 노력 속에서 남기신 가르침을 알뜰하게 얻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버이의 존재를 완성한다는 의미가 거기에 있다.

 

지금까지 내가 아버지의 흔적을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었나? 없어진 것, 복원이 불가능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전혀 경험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을 되살리려 했던 것이다. 말로는 들었으되 그것을 손으로 쥐려 하면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손바닥에는 그저 몇 알갱이의 무의미한 사금파리만 남곤 하던 과거사의 난감함! 그것을 넘어서서 과거의 실체를 한번 만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아버지의 실체는 곧 나의 실체이기도 했으므로 그 절실함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468)

 

작업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저자의 독백이다. 그의 탐색은 선친을 객체적 대상으로 한 지식의 확보라는 방법을 통해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탐색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의 내면을 통해 살아났다. 손바닥에 남은 몇 알갱이의 무의미한 사금파리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은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이들도 주인공과 그가 산 시대에 관한 지식보다 저자의 탐색 자세에서 깨우침을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임> 이 책을 읽던 중에 계룡산 갑사에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을 쪼개 마침 인근에 있는 이 책의 출발점 노성리에 찾아갔다. 주인공이 근무하던 노성명륜학교가 노성향교를 교실로 쓰고 그 옆의 윤증(尹拯) 고택 사랑채를 교무실로 썼다고 하는데, 양쪽 모두 공원화되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고택의 행랑채 자리에 도서관 기능 중심의 지역문화센터 노성서재가 있어서 방문객이 심도 있는 안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명재 윤증(1629-1714)과 그 아버지 윤선거(1610-1669), 그리고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얽힌 일이 생각난다. 송시열은 윤선거의 친구였고 윤증은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그런데 윤선거가 죽었을 때 윤증이 송시열에게 묘지명을 청하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허물을 들먹이며 성의를 보이지 않았고, 이것이 송시열을 받드는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이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 뜻을 잘 받든 것으로 이름을 남긴 윤증의 고택이 김창희 씨의 아버지 찾기 여정의 출발점이 된 것도 참 공교로운 일이다.

통영에는 연전에 강제윤 시인이 주관하는 인문학습원 행사를 따라 다녀온 일이 있다. 참 정겹게 아름다운 곳이다. 이 책에 통영의 경치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또 통영에 갈 일이 있다면 이 책의 내용이 겹쳐져 그 풍광을 더 깊이 맛볼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