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일본 지배가 끝날 때 조선인의 지상과제는 '독립'이었다. 이민족 지배를 받지 않던 조선시대라 해서 한반도가 아무런 불의도 존재하지 않던 지상낙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민족 지배는 있던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없던 문제를 새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산업사회를 향한 세계적 변화에 말 맞춰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민족사회의 주체적 대응이 일본제국의 국익을 위한 식민정책에 가로막혀, 오늘날의 '헬조선'보다도 더 심한 참혹한 상태에 민족사회가 빠져 있었다.

 

일본의 몰락이 한민족 독립의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당시의 조선 민족사회는 중환자 상태에 있었다. 일본 지배기 동안 농촌사회는 심하게 파괴되었고, 산업 건설은 일본제국의 수요에 따라 배치되어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지막 전쟁기의 극심한 착취와 파괴가 있었고, 해외로 유랑하던 수백만 인구의 귀환에 따라 식량부터 자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경제면에서부터 외부의 원조 없이 지탱이 되지 않는 사회가 어찌 독립을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일본의 패퇴가 한민족 독립을 위한 첫 번째 필요조건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의 민족사회가 안고 있던 모든 문제가 식민지배에 기인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최소한 식민지배를 통해 구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문제라도 이제부터 제대로 대처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문제를 그때까지 만들고 키워온 일본의 역할이 배제된 덕분이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는 '독립'을 민족사회의 과제로 세울 수조차 없었다. 이제 그 과제를 세워놓고 경제문제든 사회문제든 그 기준에 따라 풀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독립'의 과제가 성격을 바꾸게 된다. 해방 전의 독립운동에서는 일본제국의 타도라는 당면과제가 다른 모든 과제를 압도했다. 예컨대 일제시대의 '산업 진흥' 운동은 식민지배 체제를 고착시킨다는 의미에서 '개량주의'라는 이름으로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일본제국이 이미 타도된 이제는 특정 외세를 배척하는 것보다 민족사회의 자생력을 키우는 노력이 더 중요한 독립의 과제가 된 것이다.

 

독립의 과제가 성격을 바꾸는 데 따라 민족주의의 역할도 바뀌게 된다. '신민족주의'라는 이름을 내건 민족주의 논설로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1945년 9월)가 대표적인 것인데, 여기서 안재홍은 경쟁과 갈등보다 조화와 협력의 국제관계를 전제로 한 민족주의노선의 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입장에서 항의하는 자세보다 국제질서의 한 주체로서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해방에서 정부 수립에 이르는 3년간의 과정에서 민족주의의 역할이 계속 움츠러든 결과, 남북에 세워진 두 국가에서는 민족주의가 탈색되어 있었다. 정부 수립으로부터 불과 2년 후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 그 결과였다. 한반도의 독립을 수십 년간 막아온 일본 지배가 끝났을 때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한민족은 이후 수십 년간 냉전의 첨병 역할에 내몰리게 된 것이었다.

 

오늘날 민족주의는 한국 정치에서 큰 역할을 맡지 못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주의가 퇴조한 세계적 흐름에 부합하는 변화로 볼 수도 있는 것이지만, 민족주의가 제 역할을 한 뒤에 퇴조하는 것과 그러지 않은 채 퇴조하는 것은 다르다. 민족주의가 역할을 제대로 한 사회에서는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 질서가 어느 수준 이상으로 자리 잡혀 있어서 민족주의 퇴조 후에도 큰 혼란을 겪지 않는다. 반면 한국에서는 외부에서 수입된 정치제도가 아직도 안정되지 못한 채 사회의 갈등이 증폭되기만 하는 상황을 오랫동안 겪고 있다.

 

민족주의 퇴조가 현대사회의 필연적 현상인지 의문도 떠오르고 있다. 20세기 후반 자본세력의 세계적 권력화에 따라 세계 각지의 민족주의가 억압되어 왔고, 냉전 해소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 봉착에 따라 민족주의 정치 원리가 다시 각광받기 시작하고 있다. 세계질서 변화의 중심부에 위치한 한국은 일상적 대외정책에서 민족주의 원리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북한과의 향후 관계 전개에서 큰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필요에 입각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위축된 까닭을 살펴보려면 1945년 8월 이후 3년간의 '해방공간'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해방 당시의 민심은 단연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쏠려 있었다. 민족주의를 반대하거나(친일파) 경시하는(공산주의) 세력은 당시 조선사회에서 극소수였다. 그런데 이 극소수 세력이 남북 정부 수립의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은 무슨 까닭이었는가?

 

외세의 힘이었다. 일본을 대신해서 조선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은 당시의 압도적 강대국이었고, 점령 지역에 자기네 말 잘 듣는 정권을 세우고 싶어했다. 그래서 조선 내의 친일파와 공산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인에게는 군사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고 아무 힘이 없었다. 맨손의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조직력과 친일파의 자금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민족주의자들은 처음에 좌우익으로 갈라져 각기 공산주의 세력과 친일파 세력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나 소련과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극좌와 극우가 형성되자 민족주의자들이 협공당하는 형세가 되었다. 양극의 진영논리 앞에서 민족주의자들은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몰렸다. 1946년 초여름부터 민족주의자들은 '중간파'를 형성, '좌우합작'을 제창했다. 일단 민족국가 수립에 힘을 모으고, 수립된 국가 내에서 정책 경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극좌와 극우는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기피했다. 단일국가가 성립되면 그 안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큰 역할을 맡을 것이고, 그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소수파가 될 것이고 친일파는 처단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친일파의 분단건국 의지가 더 강했고, 이북의 공산세력은 이에 편승했다. 1947년 가을 분단건국 전망이 가시화되자 중간파는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남의 친일파는 중간파의 노력을 봉쇄하려 들었고 이북의 공산세력은 이용하려 들었다. 그 결과 1948년 4월 평양에서 남북협상이 열렸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의 좌우합작 실패는 오스트리아의 경우와 대비된다. 오스트리아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연합국에 분할점령된 나라였고, 조선보다 참혹한 좌우항쟁의 배경을 가진 곳이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인은 좌우합작 정부를 구성해서 조선보다 더 긴 10년의 신탁통치를 받고, 신탁통치 종료와 함께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했다. 왜 오스트리아인은 해낸 일을 조선인은 해내지 못한 것일까?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러나 큰 이유 하나는 짚어둘 수 있다. 유럽의 중심부, 즉 당시 '문명세계'의 중심부에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점령국의 어떤 조치도 국제여론의 관심 대상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누구도 할 수 없던 짓이 해방공간에서는 마음껏 자행되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다"는 말이 있거니와, 오스트리아에서는 국제법이 꽤 가까이 있었다.

 

70년 전과 지금의 한반도 상황을 비교하면, 문명세계의 외곽이었던 이곳이 지금은 중심부 가까운 곳이 되어 있다는 데 가장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이제 조선의 민심을 억누르고 짓밟는 짓을 어느 강대국도 70년 전처럼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오히려 사회 내부에 있다. 민심을 짓밟는 외세가 국가사회 내부에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달 동안 드러난 것과 같은 대외정책의 혼란은 이 '내면화된 외세'가 초래한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기 위해 민족주의 원리를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