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9. 27. 15:48

 

몇 해 전 박 선생님이 전주에 자리 잡은 후부터 내게도 전주 이사를 권해 왔다. 나도 솔깃했다. 수도권을 떠나 자연을 더 가까이에서 누리며 살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깡촌'에 갈 용기는 없다. 자연을 많이 누리려면 그에 따르는 부담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제주도에서 40대를 보낼 때 확인했다. 중소도시가 내 분수에 맞겠는데, 전주는 겪어본 경험이 없이도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1년에 두어 번씩 틈 나면 전주에 놀러 가 어떤 곳인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금년 들어 부쩍 현실적인 전망이 떠올랐다. 아이필드 유 대표가 전주로 이사간다는 소식 덕분이었다. 나를 잘 이해해 주는 분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 이사를 위한 큰 조건인데, 이해해 주는 분 중에도 나이 젊은 분이 우선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전주 방문 빈도가 높아졌는데, 호재가 거듭거듭 나타났다. 전주대 오 교수와 원광대 이 교수는 원래 가까이 지내던 이들이 아닌데, 전주로 향하는 내 마음을 반기며 힘껏 도와줄 뜻을 표해주었다. 결정적인 호재는 7월 초에 나타났다. 전북대 신 교수가 일산까지 찾아와 자신이 운영하는 연구프로젝트에 참여를 권해준 것이다.

 

덕분에 전주 방문이 더 잦아지고 아내의 이사 방침 승인까지 받았다. 치과, 내과, 한의원까지 전주에 확보했다. 이사를 언제 실행할 수 있을지 아직 불확실하지만, 그때까지 격주로 전주를 왕래할 방침을 정했다. 아내도, <해방일기> 작업 이래 내 생활이 너무 움츠러들어 있던 데서 조금 폭을 넓히는 편이 좋겠다고 지지해 준다. 솔직히 말해서 매주 평균 18회 이상 밥상을 차려주는 데 좀 싫증도 났을 것이다. 전주에서 살면 외식이 지금보다 훨씬 잦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전주 가서 묵을 곳을 따로 마련해 놓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두 달마다 전주 갈 때는 박 선생님 아파트 건너칸의 서재에 묵었는데, 격주로 다닌다면 피차 불편하다. 그런데 그 대책도 박 선생님이 마련해 주셨다. 서재로 쓰려다가 빈 채로 놔두고 있는 오피스텔을 쓰라고 권해준 것이다.

 

지난 월요일(21일) 전주에 내려가 이튿날 오피스텔에 입주했다. 박 선생님이 필요 없는 물건 중 오피스텔에서 당장 쓸 만한 물건을 기증해 주는데, 포터 한 차가 무색하지 않다.(나는 이 물건들을 각별히 아낄 마음으로 박 선생님 돌림자를 따서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탁이, 영식이, 영의, 영걸이, 영고, 영란이, 영장이, 영대... 이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이사와 짐 정리가 끝나고 박 선생님과 늦은 저녁식사를 함께 할 때 오피스텔 입주 소감을 묻기에 "조반 독립이 무엇보다 기쁩니다." 대답했다. 모처럼 집을 떠나와도 박 선생님 서재에서 묵으면 아침에 살림칸으로 건너가 아침식사를 대접받는 것이 관례였다. 이제 내 공간에서, 아내가 싸준 밑반찬을 영고에서 꺼내 누룽지죽과 함께 먹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 "독립 만세!"다.

 

내 인생의 행적을 보며 나를 '자유주의자'로 보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계몽사상의 자유 관념에 허상이 크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그리 큰 자유를 찾지 않는다. 다만, 생활과 일의 본질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유'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할 뿐이다. 그 약간의 자유도 절대 공짜로 여기지 않는다. 값을 제대로 치르기 때문에 알뜰하게 누릴 수 있다. 지난 몇 해 동안 일에 매달려 감옥살이 같은 생활을 자청해 왔다. 이제 생활의 자유를 요만큼 늘리는 것이 장기적 전망에서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이다.

 

막상 전주로 이사하고 나면? 다음 단계 자유의 확장을 꿈꾸기 시작하고 있다. 집에서 3-40분이면 이를 수 있는 임실이나 진안의 산골, 산 경치 좋은 곳에 창고를 하나 빌리든지 터를 빌려 컨테이너를 놓든지 해서 서재를 꾸밀 생각이다. 앞으로 전주 다니면서 볼일의 하나가 그런 마음에 맞는 터를 찾아보는 것이다.

 

'사는 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접어놓은 출사표  (4) 2015.11.10
'라이방'?  (0) 2015.10.16
부활의 꿈  (2) 2015.06.26
"헌법재판소가 어떤 기관인지 아시는가요?"  (2) 2015.06.09
가정방문?  (0) 2015.05.28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