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강의를 해보고 싶다... 하는 생각으로 강의계획을 구상해 보고 있습니다. 강단에 서는 강의가 아닌, 책을 통한 강의가 될 수도 있겠지요. 대학 강의를 염두에 두고 14개 장을 설정해 놓고, 하나하나의 장에 관한 기본적인 생각을 적어 나갑니다. 이 단계의 정리가 한 차례 되면 각 장의 내용에 대한 더 세밀한 생각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꽤 오래 걸릴 일 같으니 의견 있는 분들 붙여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1. 자연과 문명

 

문명’(civilisation)이란 말은 상당한 폭의 의미를 갖고 쓰여 왔다. 18세기 후반 계몽주의시대 유럽에서 이 말이 처음 쓰일 때는 진보사관에 입각해서 사회 발전의 수준을 표시하는 뜻으로 쓰였다. 어원인 라틴어의 ‘civitas’(도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농촌과 도시의 발전 수준 차이를 염두에 두고 근대사회의 도시적 특성을 가리킨 것이다.

이런 의미의 문명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지, 여러 개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19세기를 통해 문명을 하나의 보통명사로 보는, 즉 여러 가지 문명이 시대마다 존재했고 한 시대에도 여러 문명이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는 관점이 확산되어 20세기에는 널리 통용되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가 이 관점을 크게 유행시켰고,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도 이에 따른 것이다.

1850년대 진화론의 출현을 계기로 발생한 인류학이 20세기 들어 크게 발전하면서 문명에 관한 연구를 확장-심화하는 주체가 되었다. 인류학의 연구 대상인 인간의 정체성의 근거로 문명을 파악하게 된 결과였다. 문명을 자연과 대비시키는 이 관점은 문명의 정치적 가치를 벗겨내고 문명현상 전반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인류학의 문명 연구를 넘어서는 문명학의 필요성이 21세기 들어 제기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감이 고조되는 데 따라 문명을 외부에서 관찰하는 연구방법에 그치지 않고 그 내적 구조와 논리를 다각적으로 구명할 필요가 커진 때문이다. 이 강의는 이 필요에 부응하는 문명학의 관점을 예시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다.

 

 

2. 농업과 문명

 

문명의 발생이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는 문명의 정의(定義)에 달린 것이다. 자연 상태 속에서도 인간은 군집성을 가진 동물이었으므로 사회 조직방법, 의사 소통방법, 도구 사용 등의 발전을 꾸준히 이루고 있었다. 그런 제도와 기술이 어느 단계에 이른 것을 문명이라고 칭할 것인지는 자의적이고 애매한 문제다.

그에 비해 농업 발생을 계기로 한 본격적문명의 출발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농업 발생 전에도 식량 획득의 기술은 완만하게나마 발전해 왔는데, 곡물 재배의 기술이 확보되면서 한편으로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속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의 축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식량생산 활동에서 풀려나는 인구의 비율이 늘어났다. 사회조직의 관리, 공업과 상업, 종교-문화 활동 등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문명 발전의 에스컬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본격적문명이라 하는 것이다.

농업의 발생과 비슷한 시기에 다른 식량 획득 기술에도 비슷한 발전이 일어났지만, 곡식은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다는 특징 때문에 부의 축적 현상을 불러왔고, 이것이 문명 발전의 에스컬레이션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고대문명 중 어느 특정한 지역을 놓고 상업문명이란 말도 하는데, 농업문명을 기반으로 한 거대문명의 상부구조 일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봐야겠다.

 

 

3. 문명과 경제

 

문명은 물질적 기반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명이란 말 자체를 정신적 활동인 문화와 대비시켜 물질적 활동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정신의 절대가치를 신봉하는 입장인데, 이름을 무엇으로 하더라도 인간의 모든 지속적 활동에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는 본질적 의미가 없는 구분이다.

농업 발생 이후 잉여생산이 재화(財貨)로 축적되면서 재화를 주고받는 방법, 즉 경제활동의 양식이 인간관계와 사회조직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경제활동은 어떤 형태로든 모든 문명사회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문명현상의 고찰에 필수적인 요소다.

경제활동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근대경제학은 자본주의체제가 확장되고 있던 시기에 발전하면서 인류의 경제활동 중 시장-상품경제 측면만을 중시하는 편향성을 보였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공산주의도 이 편향성은 마찬가지다.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공산권의 붕괴에 이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와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이 편향성이 부각되고 있다.

인류가 문명을 시작한 이래 영위해 온 경제활동의 모든 양상을 검토하는 것은 자본주의체제에 의지해 온 시대를 벗어나면서 장래의 경제체제를 모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근대경제학은 이 측면에서 심각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시장-상품경제와 대비되는 증여(선물)경제에 경제학자들이 관심을 키우고 있는 것은 인류학의 문명 연구로부터 얻은 선물이다.

 

 

4. 문명과 정치

 

문명의 지속성을 위해서는 사회조직의 질서가 필요하다. 구성원의 욕망을 어느 정도까지는 채워주면서 어느 정도 이상은 억제시키는 효과적인 체제를 갖추지 못하는 사회는 오래갈 수 없고, 그 사회에 깃든 문명도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

구성원 사이의 각종 영향력을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함으로써 바람직한 질서를 세우고 지키는 것이 정치다. 사회 규모가 커짐에 따라 애정, 존경심 같은 정신적 영향력보다 힘이나 꾀 같은 실용적 요소가 비중을 키우게 되고, 재화 축적이 시작된 이후 재화의 중요성도 계속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사회 규모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실용적 요소만으로는 질서의 수립과 유지가 어렵게 되어 정신적 영향력을 새로운 차원에서 계발하는 노력이 일어나게 된다.

2천여 년 전 여러 곳에서 고전문명이 일어날 때 그 공통분모의 하나가 바로 이 이념 통치의 발전이었다. 종래의 사회조직과 다른 규모와 차원의 정치조직으로 국가가 이를 계기로 사회조직의 유력한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국가는 구성원 사이의 구체적 관계보다 추상적 이념을 통해 결속력을 확보하기 때문에 국가에는 국가주의가 따른다.

근대세계에서 국가가 정치의 최종 단위가 되어 현실정치에서도 정치철학에서도 초국가적 질서가 취약하다는 문제가 근대문명의 치명적 약점으로 부각되고 있다. 기후와 자원을 비롯한 초국가적 문제들 앞에서 중국의 천하체제 등 전통문명의 초국가적 질서를 참고할 필요가 고조되고 있다.

정치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사회 내의 권력과 자원을 구성원 사이에 배분하는 일이다. ‘사회란 통상 국가를 가리킨다. 이 인식은 근대사회의 조건 속에서 굳어진 것이며 문명의 기본 요소로서 정치의 의미와는 상당한 거리를 가진 것이다.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한다는 정치의 본질적 의미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통시대 정치사상의 재검토가 필요하다.

 

 

5. 문명과 종교

 

정치와 함께 사회조직의 질서를 확보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기제가 종교다. 종교와 정치 사이에는 상호 보완적인 측면이 있는데, 근대사회에서는 이 측면이 위축되고 정치가 종교를 대체하거나 종교와 정치가 대립하는 측면이 부각되어 있다.

오늘날 문명의 지속가능성 위기의 중요한 원인 하나가 정치과잉으로 나타나고 있다. 위기의 극복을 위해 종교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하다. 근대적 합리주의와 정치에 대한 환멸이 종교에 대한 맹목적 의존을 이끌어내는 현상을 통제할 필요가 시급하기 때문이다. ‘원리주의문제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6. 문명과 교육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문명 발생 이전부터 인간이 해온 것이다. 처음에는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하던 일인데, 문명 발전에 따라 가르치는 직업이 생겨나고 가르치는 방법도 체계화하는 추세가 나타났다. 한편으로는 전문적 교육이 필요한 복잡한 기술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규모가 커지는 사회의 결속력을 위해 추상적 이념의 계승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기술과 이념은 이후 교육 수요의 양대 측면이 되었다.

문명 초기에는 전문적 교육이 필요한 고급 기술의 범위가 좁았고 이념 교육도 지배계층 자제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교육활동의 비중이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기술 수준이 높아지고 정치 참여의 범위가 확장되면서 비중이 계속 커져서 오늘날에는 인류 활동의 상당한 퍼센티지를 제도교육이 차지하게 되었다.

문명의 흐름이 장차 어떤 곡절을 겪더라도 인간의 활동 중 교육의 비중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설령 제도교육에 투입되는 인력과 비용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그에는 비제도적 교육의 더 큰 확장이 따를 것이다. 문명의 전면적 붕괴 외에는 이 추세를 바꿀 길이 없다.

근대사회의 거대한 제도교육은 경직과 공동(空洞) 현상에 빠져들고 있다. 19세기의 산업화와 국민국가 형성에 맞춰 팽창된 틀이 이후 수요의 변화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한 탓이다. 한편으로는 기술의 세밀한 분화 발전에 맞추지 못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국가체제를 넘어서는 발전에 공헌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 노릇을 하게 되었다.

교육활동에는 문명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측면도 있고 위기 극복의 수단이 되는 측면도 있다. 너무 덩치가 커져버린 근대 제도교육을 어느 정도까지 해체하면서 본질적 의미에 입각한 질적 발전을 통해 순기능을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교육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는 근대 이전 여러 지역의 전통사회에서 나타났던 교육의 여러 형태가 참고가 될 것이다.

 

7. 문명의 신진대사

 

8. 문명의 중심부와 주변부

 

9. 문명의 이질성과 동질성

 

10. 문명 간의 접촉 양상

 

11. 상공업의 발달에 따른 문명 성격의 변화

 

12. 유럽 근대문명의 탄생

 

13. 유럽 근대문명의 성쇠

 

14. 문명 전환의 전망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