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뜻이 다른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길을 두 갈래로 나눠 볼 수 있다. 하나는 힘으로 특정 행동을 강제하거나 금지하는 물리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스스로 행동을 선택하게 하는 심리적 방법이다.

물리적 방법은 결과를 예측하기 쉽다는 장점이 있지만 효과의 확산력이 없다. 우두머리가 동원할 수 있는 자원(무력이든 재력이든)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심리적 방법은 따르는 사람의 주관에 좌우된다는 점에서 효과가 불확실한 면이 있지만, 제대로 작동이 될 경우 널리 전파되고 크게 확산될 수 있다.

지도력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가용자원의 범위를 넘어 효과를 일으키는 경우다. 따라서 물리적 방법보다 심리적 방법이 지도력의 핵심 내용이다. 물론 지도력의 발휘가 마음만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힘과 마음을 배합해서 운용하게 되지만 효과의 확장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지속적인 지도력이 아니라 그 시점의 지배력에 그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더라도 그 호소력의 시간적-공간적 범위에 차이가 있다. 작은 범위의 사람들만 공감할 수도 있고 지금 당장은 공감이 가지만 오래 못 갈 수도 있다. 보편적 원리에 입각한 호소력이라야 한 사회를 지속적으로 이끄는 지도력이 될 수 있다.

문명 초기부터 인간사회에서 도덕을 탐구한 것은 파멸이 분명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를 면하기 위해서였다. 도덕성에 입각한 지도력을 갖춘 사회는 개인 간의 투쟁보다 협력을 조장함으로써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도덕을 제도화하는 노력이 일어났는데, 종교의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발전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는 국가가 도덕의 제도화에 활용되기도 했다.

 

 

유교국가의 권위주의

 

현대사회에서 지도력이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은 도덕의 제도화가 해이해졌기 때문이다. 교회든 국가든 제도화된 도덕적 지도력이 확립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다른 곳에서 지도력을 찾을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혼란을 피하기 위해 3의 지도력을 억누르기도 한다.

3의 지도력에 대한 교회나 국가의 억압을 권위주의라고 비판하는데, 이것은 일차적으로 제도적 안정성의 필수적 측면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기존 체제의 도덕적 권위가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대다수 인민이 안정된 생활조건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성에 대한 집착이 지나칠 경우 지도력의 근거인 도덕성이 변질될 수 있다.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16세기에 도덕성의 훼손을 수습하지 못하고 종교개혁을 겪었다. 중국에서는 왕조의 도덕성 침식이 한도를 넘을 때를 대비해 혁명(革命)’의 안전판을 마련해 놓았다.

중국에서는 국가가 천명(天命)’을 내세워 도덕적 권위를 행사하는 제도가 일찍부터 발전했다. 이 제도를 조선에서도 받아들여 임금의 도덕적 지도력을 중시했다. 이 이념을 완벽하게 구현하려고 애쓴 임금이 세종이었다.

그러나 어떤 이념도 완벽한 구현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바람직한 것도 아닐 것 같다.) 세종의 아들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왕조의 도덕성에 균열이 생겼다. 이로부터 사림(士林)이 왕권과 별도의 도덕적 권위를 형성하게 되었다.

공식적 권위로서 왕권과 비공식적 권위로서 사림의 병립은 선조 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몇 차례 사화가 있었지만 체제의 근본을 흔드는 사태는 아니었다. 왕권과 사림 사이의 건강한 긴장상태가 계속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왕조의 권위가 크게 무너진 후 유교국가의 기본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하가 임금을 고르는(擇君)’ 인조반정을 통해 왕권은 땅에 떨어졌다. 18세기를 통해 숙종에서 정조에 이르기까지 왕권 회복을 위한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왕조 쇠퇴의 대세를 되돌릴 수 없었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강화도령철종과 개똥이고종의 느닷없는 즉위 등 왕권의 실종을 보여주는 사태가 거듭된다. 

 

 

조선 말 위기의 3개 층위

 

고종이 즉위하던 1860년대에는 조선사회의 위기가 안팎으로 겹쳐졌다. 내부적 위기인 왕조의 쇠퇴는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어서 국가 기능이 크게 저하되어 있었던 사실을 무엇보다 매관매직의 성행에서 알아볼 수 있다. 그 위에 국제정세의 변화가 외부적 위기를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었다.

외부적 위기는 동아시아 천하체제의 주축인 청나라의 동요를 통해 닥쳐왔다. 아편전쟁도 적지 않은 충격을 일으켰지만 베이징이 함락당한 제2차 중영전쟁(1856-1860)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위기의식에 휩싸인 청나라가 양무(洋務)운동에 나서면서 조선의 개항도 시간문제가 되었다.

대원군 집정기(1864-1873)에는 척화(斥和)의 깃발을 억지로 지켰으나 그가 물러나자 개항의 봇물이 터졌다. 그로부터 시작된 개항기는 혼란의 시대였다. 왕조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 외세가 밀려들어와 권력의 난립을 이루었다. 이 혼란이 망국(亡國)’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첫째, 왕조의 멸망. 5백여 년에 걸쳐 한반도 주민의 생활과 활동의 큰 틀로 작용해 온 조선의 멸망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왕조의 멸망이 유교국가의 이념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왕조가 왕조 노릇 제대로 못하면 망하는 것이 당연하다. 오히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전반부에 걸친 격변의 시대에 왕조 교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 더 해명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둘째, 이민족 지배. 중국에서는 이따금 일어난 일이었지만 한반도에서는 민족국가 역사상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시대에 이민족 지배를 받은 사회가 전 세계에 많이 있었지만 일본의 한국 지배처럼 지독한 지배는 다른 곳에 없었다. 그로 인해 한국 사회는 일본 통치에서 해방된 뒤에도 세계 변화에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셋째, 전통문명의 단절. 친일파를 필두로 한 외세의존적 매판세력에게 권력(무력-재력-학력)이 집중되면서 전통적 가치체계가 무너지고 민족정체성이 흐려졌다. 이 문제는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19세기 말 조선사회에 닥친 위기는 여러 층위가 중첩된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에도 혼선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응의 가장 강력한 주체여야 할 왕조의 권력과 권위가 모두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응 주체가 형성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방향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이뤄지기 어려웠던 것이다.

 

 

개화파 지도력의 허실

 

개항기의 여러 움직임 가운데 개화파를 선각자로 받드는 풍조가 있어 왔다. 반성이 필요한 풍조다.

선각자라 함은 개화’, 즉 근대화의 필요성을 앞장서서 깨닫고 실천에 옮겼다는 뜻이다. 그런데 개화의 이름을 소위 개화파가 독점하는 데 문제가 있다. 개화파에 대비시키는 수구파중에도 근대화의 필요성을 깨닫고 실천에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문제는 일본을 모델로 하느냐, 청나라를 모델로 하느냐, 즉 친일파냐 친청파냐 하는 차이에 있었다. 후세의 일본인들이 친일파를 옹호하기 위해 개화의 이름을 독점시켜 준 것이다.

물론 개화파 중에도 친일에 쏠리지 않고 주체적 개화를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다. <서유견문록> 내용을 높이 평가한 글을(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725) 최근에 봤는데, 유길준도 그런 예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김옥균, 박영효 등 널리 알려진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의 이념보다 친일의 정략에 더 투철한 사람들이 많았다.

1894년 청일전쟁 와중에 시작된 갑오경장 당시 총리대신을 맡았던 김홍집(1842-1896)과 박영효(1861-1939)의 거취를 비교해 본다. 김홍집은 온건개화파로 일본보다 청나라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일본은 그의 명망 때문에 경장 내각의 수반으로 앉혔다. 갑신정변 후 일본으로 도망했다가 일본군 등에 업혀 10년 만에 돌아온 박영효는 내무대신을 맡고 실세노릇을 하다가 몇 달 후 김홍집이 물러나면서 총리대신 서리가 되었다.

그런데 두 달도 안 된 18957월 박영효는 민비 시해 음모의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다시 도망했다. 그리고 김홍집이 총리대신으로 복귀했는데 몇 달 후 민비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몇 달 후 아관파천 때(18962) 군중에게 맞아죽었다. 오카모토 다카시는 <미완의 기획, 조선의 독립>(소와당 펴냄)"프롤로그"에서 김홍집의 죽음을 부각시켰다.

 

청일전쟁 직후 당시의 김홍집은 일본의 지지를 얻어 수차례 내각을 조직하고 근대화 개혁 정치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그 정책의 일환으로 그는 국왕과 왕비를 정부에서 분리하여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왕실의 커다란 반발을 초래했다. 그리고 189510월 일본이 경복궁에서 민비를 살해하는 사건을 일으키자, 김홍집은 일본의 뜻대로 이 사건을 유야무야 수습하려다가 왕인 고종의 신임을 잃고 만다. (...)

이러한 불온한 공기 속에 민비 살해 이래로 고종과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끼던 친러파 관료들이 결탁한다. 그들은 곧 경복궁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고 거기에서 신정부를 조직한다. 그런 뒤 김홍집 등 구정권의 요인을 죄인으로 단정하고 포박을 명령했던 것이다.

정권을 타도하는 쿠데타는 이런 과정을 거쳐 실현되었다. 상하 관민 어느 쪽에서도 지지를 상실한 것에 절망했기 때문일까? 김홍집은 담담하게 죽을 운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황현도 <매천야록>에서 김홍집이 떳떳이 죽음을 맞는 장면을 그려놓았다. 그가 민비 시해사건을 원만히 수습하려 애쓴 것이 군중의 분노를 산 것이지만, 국정 담당자로서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당시의 뜻있는 사람들은 이해했던 것이다. 반면 박영효는 일제강점기에도 귀족 대접을 받으며 아흔 가까운 나이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

충간(忠奸)의 경계가 애매한 시대상황이 있다. 한 고조가 죽은 후 실권을 잡은 여 태후가 여 씨 일족을 제후에 봉하고 싶어서 대신들의 의견을 청했다. 우승상 왕릉은 유 씨가 아니면 제후에 봉하지 않는다고 한 고조의 맹서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좌승상 진평과 태위 주발은 태후께서 황제 노릇을 맡으신 이상 여 씨를 제후에 봉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찬성했다. 조회가 끝난 뒤 왕릉이 진평과 주발에게 선제와의 맹서를 어겼다며 꾸짖자 두 사람은 대답했다. “조정에서 바른말 하는 데는 우리가 당신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직을 지키고 왕조의 앞날을 확실히 하는 데는 당신이 우리보다 못합니다.” 왕릉은 대꾸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다시 보는 의병 정신

 

개화파와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는 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주장이고 그 구체적 모습으로 의병이 떠오른다. 구체제에 집착하며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자세를 흔히 생각하는데 여기에는 반성할 점이 있다. 가장 명망 높은 의병장의 한 사람인 유인석(1842-1915)<우주문답(宇宙問答)>이란 글을 남겼는데, 정치, 사회, 학문, 종교, 윤리, 교육 등 문명 전반에 걸친 40개 주제에 관한 문답 형식의 이 글에는 당대 어느 개화론자 못지않은 넓고 깊은 식견이 담겨 있다. 그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구법(舊法)이 나라를 망쳤다고 주장하지만 망국은 개화가 행하여진 뒤의 일이었다. 구법을 행하여 망국하였다고 가정하더라도 어찌 개화하여 망국한 것만큼 심하였겠는가. 만일 나라 안의 상하대소인이 모두 수구인(守舊人)의 마음과 같이 하였더라면 나라는 혹시 망하지 않았을지 모르고, 또 망하였더라도 그렇게 빨리 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수구인(守舊人)’을 자임했지만, 변화를 무조건 거부하는 오늘날의 수구파와는 다른 뜻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더라도 내 자세를 바로 갖춘 뒤에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살펴볼 때는 그 당시의 맥락 속에서 바라봐야만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개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제였다고 하는 오늘날의 관점에 억지로 끼워 맞춰서는 원래 갖고 있던 생각을 넘어서는 가르침을 얻을 길이 없다.

의병이 군사 활동을 효율적으로 벌이지 않아서 실패하고 말았다는 비판도 승패만을 중요시하는 오늘날의 관점에 얽매이는 것이다. 서울 가까이 의병이 집결했을 때 과감하게 진군하지 않고 둘러앉아 입씨름만 하다가 대세를 그르쳤다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근사 활동보다 도덕적 시위에 의병(義兵)’의 원래 의미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야기다.

유교 질서는 무력 사용을 억제하여 전쟁과 예악(禮樂)을 천자만이 주재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제후는 천자의 위임을 받아 주재했다. 임금의 명령 없이 민간에서 무력을 일으키는 것은 명분에 관계없이 원천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의병이란 천하 질서가 비상한 위기에 처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는 현상이었다. 조선에서는 병자호란 때 의병이 나타난 후 1895년에 와서야 다시 의병이 나타났다.

궁궐이 짓밟히고 왕비가 살해당한 을미사변은 250년 만에 의병을 일으킬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국왕과 조정이 잘하고 잘못한 것을 따지는 것은 국왕과 조정이 지켜진 뒤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친일 정부가 전복되자 일부 의병이 무기를 내렸고, 1년 후 고종이 환궁하자 거의 모든 의병이 해산했다. 국왕과 조정이 주권을 회복한 상황에서는 의병의 명분이 해소되기 때문이었다.

1905년 을미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전면적으로 침해됨에 따라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19077월 고종의 강압에 따른 퇴위와 뒤이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활동은 전국적, 전사회적으로 확대되었다. 1908년 초 1만 의병의 양주 집결이 가장 적극적인 출동이었다. 당시 서울 진격을 주장한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진격을 반대한 주장에도 타당성이 있었다. 명목상의 임금(순종)이 존재하는 도성에 진격을 삼가고 민의를 시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유교 질서의 기준에는 합당한 것이었다.

의병 운동이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고 경시하는 것 역시 결과만을 중시하는 지금의 세태에 얽매인 단견이다. 그런 기준으로는 독립운동과 광복군의 의미도 무시될 것이다. 당시의 세계정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국면에 있었다. 일본을 위시한 외세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정면대결을 허용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는 우리의 선인들이 어떤 을 행사했느냐 하는 것보다 어떤 을 세웠는지가 더 중요하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E H 카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라고 한 말이 널리 회자된다. 이 말의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는 것이 현재의 의미다. 우리의 근대적 사고를 지배하는 진보주의 관점에서 현재는 과거보다 진보된 상태이므로 현재의 관찰자는 덜 진보된 과거를 내려다보기 쉬운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갖추고 있는, 또는 갖춰가고 있는 발전된 탐구방법을 통해 과거의 사실을 우리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으로는 과거로부터 지혜를 얻는활동으로서 역사학의 의미가 부정되거나 축소된다.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도 그런 관점 덕분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로 인류사회의 진보가 종착역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던 후쿠야마도 2008년 금융위기 앞에서는 관점을 수정해야 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한계가 금융위기를 통해 드러날 것이라고 1970년대 이래 예견해 온 월러스틴과 아리기 등 비교사회학자들의 세계체제론이 부각되고 있다. 그들은 유럽중심주의가 빚어온 많은 착시 현상을 지적해 왔는데, 역사진보주의도 그중 하나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성립하려면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 현재가 과거를 깔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가르침을 찾으려 애쓸 때 대화로서 역사학의 의미가 살아난다.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가요?” 현재가 과거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근대화에 매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19세기 말 조선사회에서도 근대화의 원조랄 수 있는 개화를 내세운 사람들이 길을 잘 찾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1980년대의 세계관으로 1880년대의 현상을 재단한 것이다. 그런 눈으로 1880년대 개화파의 지도력을 평가하는 것은 1980년대의 근대화주의를 증폭하는 방편일 뿐이지, 1880년대 사람들에게서 가르침을 얻는 길이 아니다.

서세동점 현상은 19세기 후반 이래 한민족의 역사가 고통과 치욕의 길에 빠져드는 배경조건으로서 압도적 위세를 떨쳐 왔다. 식민지 전락과 민족 분단의 근본 원인이 이 현상에서 나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21세기 들어 이 현상의 해소 조짐이 뚜렷해지고 있다. 서세동점을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생각해 온 여러 가지 일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새로운 상황에 잘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150년 동안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던 근대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반성하기 위해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얻을 필요가 절실해졌다. 개화파를 의심쩍게 보고 위정척사파를 숭상하던 19세기 말 당시의 민심을 무지몽매한 것이었다고 오만하게 내려다보기보다, 우리가 그 동안 잃어버린 지혜가 그 안에 들어있었던 것은 아닌지 열심히 찾아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