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제일 많이 회자되는 답변이 E H 카가 1961년에 낸 같은 제목 책에 나오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란 말이다. 말인즉 간단하지만, 과거와 현재 사이에 실제로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19세기 중 유럽에서 틀을 잡은 근대역사학에는 이 대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근대인의 오만때문이다. 모든 근대사상의 바탕에 깔려있는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이 더 많이 진보한 현재가 덜 진보한 과거를 깔보게 만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도 의미 있는 대화가 이뤄지려면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현재가 과거를 깔보는 자세로는 대화에 한계를 피할 수 없다.

카가 대화를 내세운 것은 근대역사학의 불통을 반성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 반성이 진지한 것이었다고 인정한다. 이 말을 한 것은 19세기 중엽 이래 근대역사학을 지배해 온 실증주의(positivism) 비판의 맥락에서였다. “과거의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한다는 실증주의 입장은 오늘의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었으니, 오만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어느 역사가도 역사적 사실의 인식에서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고 인정한 카의 입장에는 오만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진지한 반성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반성은 못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열이 오르는 환자를 놓고 실증주의자가 열이란 건강의 표시다. 시체는 차갑지 않은가?” 하면서 몸을 더 덥혀주라고 하는데 카는 고열이 계속되면 신체 기능이 저하되어 회복이 어렵다며 얼음찜질을 권하는 정도다. 열병의 원인을 밝히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카는 근대역사학의 지나친 폐단을 반성하면서도 그 구조적 문제를 스스로 벗어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보여준 두 가지 믿음에서 그 사실을 알아본다. 그 하나는 역사학에서는 우연성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이고 또 하나는 도덕성 아닌 이성만으로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합리주의의 믿음이다.

 

 

역사의 필연성과 역사학의 과학성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할 일이라고 카는 말한다. 사건의 여러 주변조건 중에서 진정한원인을 가려내는 기준을 카는 일반화가 가능한지 여부에 두었다. 존스 씨가 모는 차에 로빈슨 씨가 치어 죽은 사건을 그는 예시한다. 로빈슨 씨는 밤중에 담배 사러 나온 길이었고, 존스 씨는 술에 취해 있었으며, 존스 씨의 차는 브레이크에 결함이 있었고, 사고 장소는 길이 급하게 구부러진 곳이었다고 한다.

음주운전 단속을 강화하고 차량정비 점검을 엄격하게 하고 위험한 도로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이런 사고를 막기 위한 적절한 조치이지, 담배의 야간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카는 지적한다. 담배 사러 가는 길이었다는 것은 이 사고의 진정한 원인이 아니라 우연한 요소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되는 비유다.

하지만 비유의 힘에 기대어 논리의 허점을 얼버무리는 문제가 있다. 담뱃가게가 위험한 장소에만 위치해 있고, 오후 늦게 배달을 받아 밤중에만 품종이 제대로 갖춰져 있다면? 담배 판매방법을 개선하는 것도 로빈슨 씨와 같은 사고를 줄이기 위해 효과적인 대책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원인의 일반화는 특정한 맥락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 맥락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믿음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과신이다.

한국의 뉴라이트 논설을 보면 카가 뭐라 할까? 안병직은 한국 근·현대사의 체계와 방법”(<시대정신> 40, 257)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민중 운동사가 북한의 역사관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민중 운동사가 제시하는 대로 국정 방향을 설정하면, 국가의 장래는 지금의 북한 꼴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독자들은 필자가 왜 한국 근·현대사의 주조를 민중 운동사에 두지 않고 대한민국사에 두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놓고 사회주의의 실패와 자본주의의 성공을 일반화한 안병직의 주장은 명백히 자의적인 것인데도 이런 일반화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주장의 원형인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문명화론은 20세기 초에 큰 위세를 떨쳤다. 식민체제 구축을 위해 조선의 전통과 질서를 파괴하면서 문명화의 이름을 내건 것이다. 그리고 그 문명화론의 원조인 백인의 짐주장은 더 큰 위세를 전 세계에 떨치기도 했다.

카와 같은 근대 역사가들이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집착한 것은 과학적 정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역사학을 투쟁의 무기로 삼기 때문에 과학성이 필요한 것이었다. 침략을 정당화하는 백인의 짐이나 문명화같은 주장들이 당시에는 강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당하는 측에서도 승복하는 풍조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일반화의 기준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필연성이 부인된다.

19세기에 자연과학이 숭배 대상이 되면서 인간사회도 같은 방법으로 탐구하겠다는 사회과학이 일어났고, 역사학도 사회과학의 범주에 넣겠다는 것이 근대역사학의 주류가 되었다. 그런 노력이 역사학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크기는 하지만, 지나친 믿음이 가치체계를 침해하는 폐단이 위의 사례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몇 해 후 1968년의 문화혁명’을 거치고는 역사학의 과학성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여러 방향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지 이거스는 <20세기 사학사>(임상우-김기봉 옮김, 푸른역사 펴냄) 182쪽에서 헤이든 화이트가 <메타역사: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1973)에서 제기한 역사 서술에는 어떤 진리의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주목한다.

 

사료에 대한 문헌학의 비판적 작업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를 넘어서 역사적 설명을 구성하는 단계로 진입하는 것은 화이트의 경우 과학적 고려가 아니라 미학적-윤리적 고려에 의해 결정된다. 그는 역사 서술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 “역사 이야기는 언어적 허구이고, 그 내용은 발견된 만큼 창안되며, 그 형태는 과학보다는 문학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같은 책 151쪽에서 이거스는 1979년에 나온 로렌스 스톤의 논문 이야기체 역사의 부활: 새로운 옛 역사에 대한 고찰에도 주목한다. 객관적 고찰의 대상이던 추상적 인간 대신 구체적인 인간의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이야기체(narrative) 역사로 돌아갈 전망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스톤은 1970년대에 역사가 파악되고 서술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사회과학적 역사의 핵심을 구성한 과거의 변화에 대한 정합적인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널리 거부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인간 실존의 매우 다양한 측면에 새롭게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등장했는데, 거기에는 집단의 문화 및 심지어 개인의 의지는 잠재적으로 최소한 물질적 산출과 인구의 증가라는 비인격적인 힘만큼 중요한 변화의 인과적 동인이다라는 확신이 동반되었다.

 

카가 1982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 <역사란 무엇인가>의 개정판을 위한 서문 원고가 발견되었다. 이 글에서 그는 1960년의 낙관과 1980년의 비관을 대비시켰다. 1960년에는 소련과 미국이 스탈린주의와 매카시즘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유럽의 부흥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서 세계경제도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반면 1980년에는 냉전의 긴장이 다시 심화되고 있었고 세계경제는 불황과 위기의 연속인데다가 제3세계의 대두가 세계질서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변화에 대한 불만과 불안을 토로한 다음에 카는 이런 변화를 싫어하는 것은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는 서방 지식인의 입장이며 제3세계 인민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수반하는 이 변화를 반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이 서방 지식인이기는 하지만 주류가 아닌 재야(dissident) 지식인이기 때문에 제3세계 인민의 입장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역사의 객관성을 중시하던 카가 만년에 이처럼 입장에 얽매이는 것이 뜻밖의 모습이다. 그가 죽기 전에 개정판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이 시간 부족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초판을 낼 때의 낙관을 잃어버린 입장에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개정이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도덕성의 문명과 진보성의 문명

 

카가 역사학의 과학성을 주장한 또 하나의 논점은 도덕성이 역사서술의 기준에서 배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관은 그가 속한 시간과 장소에 따라 빚어지는 것이므로 일반화의 기준이 될 만한 객관성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해서 안 된다는 것은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역사서술도 일종의 서술이므로 가치기준이 없을 수 없다. 카는 도덕성 대신 진보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과학적 역사학이 성립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평가를 예로 든다. 서방의 과학기술을 도입해서 농업국가 소련을 산업국가로 만드는 것이 스탈린 당시의 소련에게 진보의 과제였다고 본다면, 이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스탈린이 저지른 어떤 짓도 지도자로서 그의 위대성에 흠이 되지 않는다고 카는 주장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에서도 공산화가 진보의 과제였기 때문에 공산혁명의 성공에 기여했는가 여부에 따라 그 전의 모든 일을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카가 이런 말을 한 30 년 후에 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이 붕괴했다. 그때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말한 것은 이뤄질 진보가 모두 이뤄졌다는 뜻이었다.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는 카가 생각했던 진보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후쿠야마가 생각한 진보도 지금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어 있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해도 바뀌지 않는 진보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카가 개정판 서문을 쓴 것은 공산권 붕괴의 10년 전이었다. 이 글에서 그는 진보에 대한 믿음이 흐려져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파괴와 붕괴만을 미래에서 바라보며 진보에 대한 믿음이나 인류의 향후 발전에 대한 전망을 잘못된 것이라고 치워 버리는 오늘날 회의감과 절망감의 풍조는 일종의 엘리티즘이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이 위기 속에서 안정된 위치와 특권을 위협받는 사회적 엘리트집단과 과거에 다른 지역들을 당당하게 지배하던 위상이 무너지고 있는 엘리트국가들이 일으키는 풍조일 뿐이다. (<Wikipedia> "What is History"에서 재인용)

 

카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도덕성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태도와 성격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도덕성이 쇠퇴하는 현실 속에서도 도덕적 인간은 도덕성의 실현에 역사의 목적이 있다고 보는 것처럼 진보적 인간은 진보의 이념이 버림받는 현실 속에서도 궁극적 진보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카에게는 진보에 대한 헌신이 바로 도덕성이었던 것이다. 각자가 속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내용이 좌우된다는 것은 진보나 도덕성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과연 도덕성에는 불변의 요소가 전혀 없는 것일까? 공자는 최고의 도덕적 가치로 자신이 받드는 ()’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을 때 차마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라고 대답했다. 인간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갖추고 있는 자연스러운 품성을 내놓은 것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최대한의 보편성을 확보하려는 뜻이다. 거의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낮은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의 어느 구성원도 벗어나지 못하는 도덕성의 그물을 만들려 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에 좌우되지 않는 보편적 도덕성의 확립이 그의 가르침이었다.

공자가 산정(刪定)<춘추(春秋)>를 모델로 한 유교사회의 역사서술은 도덕성의 관리에 첫 번째 목적을 두었다. “공자가 <춘추>를 산정하매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두려워 떨었다는 말을 하고 춘추필법(筆法)’이란 말도 한다. “작은 말에 큰 뜻을 담는다(微言大義)”는 말은 사실의 담백한 서술에도 도덕적 평가를 함축한다는 뜻이다.

과거사를 반추하는 일은 역사학이 학문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전, 문명 초기부터 인간의 중요한 활동이었다. 문자 발생 이전부터 시작되었다. 부족사회에서 주술사의 푸닥거리는 부족이 겪어온 일, 부족이 배출한 뛰어난 인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구성원의 결속력을 늘려주었다. 문자 발생 후에도 비슷한 목적을 위해 역사서술이 발전했다.

원시적 역사서술은 주관적 기준에 따랐다. 도덕성의 기준이 가변적이라고 카 같은 근대 서양인이 본 것은 이런 단계를 지목한 것이다. 그러나 공자 이후 중국의 역사서술은 보편성을 추구하는 원리를 채택했고, 그런 의미에서 학문이 된 것이다. 보편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근대역사학과 유교사회의 역사학이 같은 성격을 가진 것이다.

차이는 보편성 구현의 실체로 도덕성을 설정하느냐 진보성을 설정하느냐에 있고, 그것은 배경 문명의 성격에 달린 일이다. 중국문명이 도덕성을 중시한 것은 질서와 안정을 추구하는 자세가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여러 형태 권력의 자의적 발동을 도덕성의 원리로 억제하는 데 중국문명의 지속성의 근거가 있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와 달리 발전과 변화를 추구하는 경향이기 때문에 도덕성을 배척하고 진보성을 내세운 것이었다. 힘을 가진 세력이 질서의 원리에 제약받지 않고 변화를 추동해 나가도록 풀어주고 밀어주는 것이 진보주의 이념이었다. 역사의 추동력을 가진 세력을 자본가로 보느냐, 프롤레타리아로 보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자의적 판단에 달린 일이었다.

도덕성은 인간의 본성을 기준으로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합의는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노력을 기울이는 데 따라 수렴의 힘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반면 진보성에는 방향 설정의 확실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의 진보성을 추구하는 노력이 늘어날수록 사회의 갈등이 격화하게 되어 있다. 근대역사학이 분쟁의 심화나 강자 입장의 정당화에 쉽게 이용되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명의 안정성을 위한 인문학의 역할

 

19세기에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산업문명과 그를 배경으로 한 근대역사학이 20세기 세계를 풍미한 것을 서세동점(西勢東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룬 서유럽 열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세계를 휩쓸자 여타 문명권의 학술과 사상까지 유럽의 과학앞에 굴복한 것이다.

역사학의 전통을 비롯한 풍부한 학술과 사상의 자산을 가진 중국문명권의 항복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열세 때문이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의화단사건으로 청나라의 위기가 극대화되었을 때 중국 학술계에서는 의고(疑古)’의 학풍이 일어났다. 상고시대에 관한 경전의 기록을 엄격한 비판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이 학풍은 전통적 학술과 사상을 포기하고 서양식 학문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뒤이어 중국 사상계를 휩쓴 신문화운동은 전통의 가치를 부정하는 풍조가 더욱 확장된 현상이었다.

서세동점 현상이 퇴조하고 있는 지금 전통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본다. 백 년 전 침략의 위기에 쫓기며 내버린 전통 중에 재활용이 필요한 것은 없을까?

서세동점의 물결이 일어나고 가라앉는 이치부터 살펴본다. 18세기까지 동아시아문명은 물질 측면에서도 유럽보다 우위를 지키고 있었다. 농업생산력도 우월하고 제조업 기술 수준도 앞서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은 16세기 이후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미개 지역을 정복하고 천연자원과 노동력을 대거 수탈하면서 경제적 변화의 큰 흐름을 만들었다. 그 흐름이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량생산 체제를 구축하는 산업혁명을 가져왔다.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해 변화를 무조건 숭상하고 정체(停滯)’를 무조건 폄하하는 진보주의가 유럽을 풍미하게 되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는 데는 19세기 초에 나온 원자론이 도움이 되었다. 모든 물질의 근본 원리를 인간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면 어떤 변화를 통해 마주치게 될 어떤 상황도 겁낼 필요가 없었다. 원자론은 또한 고립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본성을 억눌러줌으로써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유행에도 공헌했다.

물리학에서 운동량은 질량과 속도에 비례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산업혁명 이후 유럽문명의 변화 속도가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에 19세기의 문명의 충돌에서는 질량이 더 큰 문명도 유럽문명의 기세에 밀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유럽문명이 보인 변화의 속도는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정적 한계가 1970년대 이후 환경과 자원의 벽으로 확인되어 왔다. 그 동안 유럽문명은 북아메리카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 그리고 일본까지 끌어들여 서양문명으로 자라났으니 질량은 늘어난 셈이지만, 이제 변화의 속도가 너무 떨어져 운동량의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 (일본을 서양문명의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인종차별 시대의 남아프리카에서 일본인을 백인으로 분류한 것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성공이 아니겠는가.)

서세동점 현상의 퇴조는 유럽-서양문명의 운동량 하락에 따른 것이다. 지난 3세기 동안 세계의 변화를 주도해 온 힘이 물러서고 나면 이제 세계의 진로를 어떻게 가늠할 것인가?

과거와의 대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장면이다. 인간 이성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유럽-서양문명에서는 현재보다 덜 진보된 과거를 멸시하며 과거의 경험을 경시했다. 그 결과 인간 본성에서 벗어나는 행태가 만연해서 지금의 위기에 이른 것이다.

새로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생각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새로운상황이라고 하지만 그 구성 요소가 모두 전에 없던 것은 아니다. 인류가 역사를 통해 겪어 온 온갖 상황에서 나타났던 여러 구성 요소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조합함으로써 닥치는 상황의 대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거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되 현재의 조건에 따른 약간의 조정을 가하는 것이 현명한 대응방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안정된 시각이 필요하다. 아직도 근대문명에 절대적 가치를 두고 있는 뉴라이트는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한다. 뉴라이트가 옹호하는 신자유주의 노선에 끼워 맞춘 관점인데, 그런 편협한 관점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대한 안정적 시각이 불가능하다.

인문학이란 이름을 붙이든 말든 인간성의 고찰은 모든 고등문명에서 중요한 지적 활동이었다. 인간의 속성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를 위한 노력 없이는 문명의 안정성을 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0세기의 유럽-서양문명에서 이 노력이 소홀했던 것은 농업문명에서 산업문명으로 옮겨가는 이행기의 특수한 조건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변화가 빠른 시기이기 때문에 안정성을 경시할 수 있었지만, 그런 특수조건은 오래 가지 않는다.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효과적 비판으로서 세계체제론이 1970년대에 제기된 것도 그 시점에 문명의 위기가 부각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세계체제론의 핵심 이론가 중 하나인 죠반니 아리기(1937-2009)는 마지막 역작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길 펴냄)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다음 단계에서 중국의 문명전통이 큰 역할을 맡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동아시아의 전통 역사학을 복고주의라 하여 진취적이지 못함을 흠잡곤 했다. 과거에만 매달려 미래를 내다볼 줄 모른다면 물론 학문의 역할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된 오늘의 위치에 자만심을 품고 옛사람들의 경험과 지혜를 무시하는 근대역사학의 오만으로는 과거와의 대화가 어렵다. 문명의 안정성에 공헌하는 역사학의 역할도 이뤄질 수 없다. 조그만 사건 하나를 놓고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경망도 이런 오만에서 나오는 것이다.

역사 공부를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읽은 책의 하나가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였고 그의 현란한 논설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얼마 후 중국사를 전공으로 잡고 많은 중국 역사서를 읽으면서도 카가 말한 과학적 역사학에 이르지 못한 미숙한 서술이라고 낮춰보는 마음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4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카에게 넘겨받은 편견으로 인해 인문학의 마음을 여는 데 장애를 겪었음을 반성한다. 새로운 눈으로 중국 역사서를 다시 읽으면서 인문학적 역사서술의 길을 다시 찾아보려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