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의 제자백가 가운데 정치사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것은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였다. 전체적으로는 유가가 더 널리 퍼져 있었지만 진()나라는 법가를 채택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룸으로써 천하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가는 진나라가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하게 된 원흉으로도 꼽힌다. 시황제(始皇帝)가 죽은 뒤 환관 조고(趙高)가 권력을 장악해 유능한 인재를 멋대로 죽이고 나라를 망친 것은 법가에 의거한 맹목적 통치체제 덕분이었다고 지적된다. 그리고 형식적 법률체계에 매달려 백성을 편하게 해 주지 못했기 때문에 민심이 반란군 쪽으로 휩쓸리게 되었다고 한다.

 

진나라의 뒤를 이은 한()나라가 법가를 기피한 것은 이런 나쁜 평판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율적 통치방법으로서 법가의 매력을 황제들은 버릴 수가 없었다. 특히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무제(武帝)는 법가 전통을 이어받은 혹리(酷吏)들을 많이 등용했다.

 

사기(史記)” ‘혹리열전의 가장 대표적 인물은 장탕(張湯)이다. 장탕이 미천한 출신으로부터 3(三公)의 하나인 어사대부(御史大夫)의 신분에 오른 것은 법체제의 정비와 집행을 엄혹하게 한 공로 덕분이었다. 너그러운 정치를 주장하던 순리(循吏)의 대표적 인물 급암(汲黯)은 혹리들의 득세가 민심을 각박하게 만든다고 탄식하여 도필리(刀筆吏: 기능직 관리)에게 정치를 맡기면 안 된다는 말이 맞음을 장탕을 보면 알 수 있다. 천하 사람들이 외발로 서 있는 듯 불안하고 서로를 곁눈질로 쳐다보게 되었다고 했다.

 

장탕이 후에 모함에 걸려들어 엄혹한 법집행의 대상이 되었을 때 결백함을 밝히려고 발버둥을 치자 오랜 동료 조우(趙禹)가 타일렀다. “자네의 고발로 신세를 망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가? 자네가 쓰던 법망에 이제 자네가 걸려들었는데 이 법망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단 말인가?” 이에 장탕은 체념하고 자살하였으며 덕분에 그의 명예와 자손은 보전되었다고 한다.

 

사마천(司馬遷)혹리열전서문에서 정()과 형()으로 백성을 다스리면 이를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게 되므로 덕()과 예()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물리적 규제보다 심리적 감화가 질서의 중요한 원천임을 지적하며 법치(法治)의 한계를 말한 것이다.

 

요즘 정치권에서 걸핏하면 법적 대응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며 정치의 실종을 걱정하게 된다. ‘법적 대응은 의혹을 푸는 유일한 길도 완전한 길도 아니며 정치의 사회지도 기능을 없애는 길일 뿐이다. 무제 때 혹리들은 법치의 명분으로 공포정치를 도입, 황제의 통치를 쉽게 만들어줬지만 정치의 수준을 떨어뜨리고 자기들 신세도 망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계할 일이다. 199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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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